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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땅 충만으로 잃은 두 개의 하늘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4 10:24 · 7,559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가 마침내 성전 뜰로 나가 앉아 통곡 속에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귀환한 백성들이 이방여인과 통혼한 사실을 알게 된 에스라가 지도자로서의 중보적 입장에서 보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절한 통곡의 진짜 이유가 뭔지 혹시 아십니까? 잘못을 뉘우침이 아니라 아까워서 그럽니다. 땅으로 충만하여 잃은 두 개의 하늘이 너무 아까워서 통곡을 하는 겁니다. 회개는 뉘우침이 아니라 아까워함입니다.

땅 충만으로 잃은 두 개의 하늘

(에스라 10:1~5)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땅 충만으로 잃은 두 개의 하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땅 충만으로 잃은 두 개의 하늘

마음이 땅의 충만함으로 인해서 두 개의 하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앞서 본 9장의 에스라의 중보적인 회개 기도와 이어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스라가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했는데 본문에서도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나 처절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참담한 일을 겪거나 급격한 회개의 감정이 몰아칠 때에 겉옷을 찢습니다. 강렬한 후회의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에 회개의 마음으로 겉옷을 찢었는데,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까지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망연자실해 있습니다.

내일 보겠습니다마는 포로 귀환자가 5만 여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결혼할 수 있는 남자는 만 명이나 되었을까요? 그들이 귀환하여 유다 땅에 와서 80년 사는 동안에 112명이 이방인 여자와 결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방인과 통혼했다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는 등 난리를 치고 성전 앞에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던 것일까요?

이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함께 통곡하게 되는데, 잘못을 깨달아서 통곡을 하는 것인지 그냥 따라서 하는 것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웃으면 따라 웃게 되고, 계속 슬피 울면 따라 울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을 염두에 두면 그런 이유에서 따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결혼했던 이방 여자와 그로 인해 생겨난 자녀들까지 다 내보내기로 하는 결단을 하는 것을 보면 백성들이 단순히 에스라에게 동화되어 울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그렇다면 에스라는 이방 여인들과 통혼한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성전 뜰에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할 정도의 행동을 하였을까요? 물론 에스라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중보적인 입장에서 회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들과 통혼했다는 것은 신명기 7장에서 정해놓은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탈했다는 이유에서 에스라가 통곡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한 행동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발생할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 기도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도 부흥운동 때와 같은 2차 부흥운동을 위해 기독교 100주년 때에 회개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이 나와서 각 방면을 맡아서 대표로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남을 도와주지 못했다든지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든지 등등의 주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뉘우치는 것을 회개로 알고 회개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내 행동이 기준에서 벗어났음을 뉘우치거나 그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내게 주어질 형벌을 두려워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아까워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이 아깝다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복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번호를 노트에 잘 적어두고 발표 날에 100억에 당첨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복권을 찾으려고 하는데 보이질 않습니다. 알고 보니 바지주머니에 넣고 세탁을 하는 바람에 다 녹아서 없어지고 가루만 남아버렸습니다. 이때의 100억을 잃어버리고 놓쳐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이러한 아까움 때문에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에스라는 두 개의 하늘을 놓쳤음을 아까워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통혼은 곧 세상 문화가 선민 유다 백성들의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세상 문화가 완전히 마음을 잠식하고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성전이 생활화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땅의 것이 마음에 들어올 때마다 즉시 상번제가 드려짐을 기억하여 내 마음이 어린양과 함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번제입니다. 이 고백이 생활화되어야 했지만 이것을 하지 않게 됨으로서 이방 문화가 마음에 들어오게 되고 선민들은 두 개의 하늘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왜 두 개라는 것일까요?

 

첫 번째 마음의 하늘이 있고 두 번째로 육체의 하늘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지는 하늘과 육체가 가지는 두 개의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에스라는 이 두 하늘을 잃은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에서 회개를 하였던 것입니다. 100억을 내 손에 쥐었다가 놓쳐버린 것과 같은 안타까움과 아까움이 있어야만 회개는 일어납니다. 하늘 아까운 줄을 모르면 회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하는 회개는 아직도 내 안에 갇혀있는 것으로서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지는 하늘과 육체가 가지는 하늘이란 무엇일까요? 이방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 세상 것들로 인하여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선민은 이러한 상황에서 성전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을 죽이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세상 대신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지도록 허락된 하늘입니다.

한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도 육체는 땅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에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있고 이웃과의 관계가 있고 직장에서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체의 연관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육체의 연관성 안으로 들어오는 하늘 기운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할 때에 하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 남은 육체에도 허락된 하늘이 생겨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늘의 기운들을 육체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과의 통혼이 상징하는 대로 세상 문화가 내 안에 충만해지면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마음에 허락된 하늘을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비어있어야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데, 마음에 세상이 차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모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육체의 연관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펼쳐져야 될 하늘의 기운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 생활화를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두 개의 하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 생활화가 되고 있었다면 마음이 이방 문화로 인해 충만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성전을 향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늘을 아까워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마땅할 잘못들이 나타나는 이유도 마음이 땅으로 충만함에 기인합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붙잡으면, 마음의 성소에서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실제로 돈을 벌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합니다. 이로부터 온갖 잘못된 행동들이 나오게 됩니다. 돈이 아니라 자식이나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인기나 명예나 교회의 숫자적 부흥 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마음의 지성소가 붙잡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또한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이 죄악입니다. 하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범죄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범죄 행위만을 뉘우치고 마음의 지성소가 붙잡고 있는 기쁨과 만족의 원천은 그대로 세상 것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회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을 붙잡고 만족하고 기쁠 것이라고 믿으면서 잘못된 도둑질과 사기를 친 것만 회개한다면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억을 잃어버렸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놓쳐버린 하늘을 아까워해야 회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회개를 하는 지도자가 있을 때에 백성들도 참 회개 운동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에스라와 같이 행동한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41~42절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신 일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성전정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까지 세상 문화가 침투해 들어온 것을 보고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성전을 향하여 우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존재의 의미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울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유에서 우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돈이 있어야 만족하고 기쁘겠다는 생각이 들어올 때 번제를 통해 그러한 마음이 죽어야 하는데, 그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의 마음조차도 마음에 돈을 가득 채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얻게 될 하늘과 육체가 땅에서 얻게 될 하늘을 다 놓쳤음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아까우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8절을 보면 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부활과 승천이 있는 방향과 세상의 방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의 지성소에서 믿음을 세상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과 무병장수와 인기와 부를 얻으려 하고 부흥과 좋은 예배당이나 지으려는 쪽으로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곧 성전의 의미의 완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향해 울었던 것은 예수님이나 에스라가 성전을 보며 울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충분히 울만한 이유가 됩니다. 마음이 십자가를 따라 부활승천의 방향으로 올라갔더라면 하나님을 모시고 변치 않는 행복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아있는 육체도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당신의 뜻을 펼쳐 가시는 역사의 현장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하늘을 모두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어서 19~20절에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하늘을 얻지 못하고 허락된 하늘을 잃는 것이 그 자체로서 멸망입니다. 끝내 십자가를 져버리고 세상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라는 것은 이 땅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이렇게 기뻐할 일이 생겨봐야 곧 부끄러움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보고 우셨고 사도 바울은 성전의 의미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성전 생활화와 십자가 생활화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늘과 땅의 두 하늘을 잃고 있습니다. 이 하늘이 얼마나 좋기에 그럴까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해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보고 거기서 살기를 바랐습니다. 산 아래에 있을 때에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 예수님과 함께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대장부다운 비전이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고는 그 원대한 비전을 다 망각해버립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마음이 하늘을 갖게 되면 가장 좋은 여러분의 소원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마음이 하늘을 가질 때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루고 싶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좋은 소원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망각하게 하는 그런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육체도 하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20절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11~12절에서도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하늘을 가진 자의 육체에 일어날 일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는 자의 육체에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만큼 하늘이 내려오리라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이것을 다 놓쳐버렸으니 에스라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인 여자와의 통혼이 상징하는 대로 이 땅의 문화와 가치로 내 마음이 충만해짐으로 이 두개의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하늘이 너무나 아까워서 에스라도 울고 예수님께서도 우셨고 사도 바울도 울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분들이 아까워서 통곡하던 심정이 우리의 심정도 되게 하셔서 단 한 순간도 마음 하늘과 육체의 하늘을 잃고는 살 수 없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