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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강남을 친구 따라갈래, 끌고갈래?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3 10:06 · 7,260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만 있지, 친구 끌고 강남 간다는 속담은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의 삶에서도 반드시 따라갈 때가 있고 끌고 갈 때가 있습니다. 이 때가 합당하면 삶은 천국이 되고 반대로 따라가야 할 때 끌고 가려 하고 끌고가야 할 때 따라가려 하면 그곳에 바로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립니다. 따라갈 대상은 예수님 한 분이시면 됩니다.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끌고 갑니다. 끌고 가려는 의도가 없을 때조차도.

강남을 친구 따라 갈래, 끌고 갈래?

(에스라 9:1~15)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강남을 친구 따라 갈래, 친구 끌고 갈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강남을 친구 따라 갈래, 친구 끌고 갈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흡연 문제로 고심하는 지도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담배 피우는 친구가 있으면 담배 피우는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이며, 집안에서 아버지나 형이 담배를 피울 때에 청소년들이 따라 피우게 될 확률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청소년들이 담배 피울 확률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영향을 받을 확률이 18배나 높았던 반면에, 아버지나 형에게 담배를 배울 확률은 2.25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에게 담배를 피울 경우, 확률은 1.13배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담배를 피울 때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친구가 피울 때에는 동질감을 느끼며 따라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에는 숨겨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가는 사람이 있는 한편에는 친구를 강남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경우를 주로 문제시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상황이 달라지지만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도 친구 따라 강남 가서 망한 케이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에스라가 귀환하여 가져온 예물도 성전에 드리고 번제까지 잘 드렸습니다.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가 포로들과 함께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1차 귀환해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에스라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앞 다투어 이미 지역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의 여자를 아내나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친정에서 행하던 문화가 그대로 선민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성전의 생활화는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라는 일찍이 귀환한 선민들에게서 신앙의 열정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그 이유를 살펴보니 이방인들과의 통혼 문제로 인해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회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이방 왕인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기적적으로 귀환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성전이 재건되었건만 또 다시 나라가 망하던 시절에 행했던 일들을 다시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를 에스라는 11~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러움은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더러움이 발생하는 장소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공백이 있어서 만족과 기쁨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들여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대상들을 붙잡는 곳이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돌판이 있었듯이, 사람의 마음의 지성소에도 말씀하시고 살아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이 모셔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돈 성공 권력 대통령자리 등의 이 세상 가치가 들어오면 더럽혀지게 됩니다. 대통령자리도 돈도 그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퇴비가 농사지을 밭에 쌓여있을 때에 그것을 더럽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밭일을 하다가 퇴비가 묻은 옷을 입고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온다면 더럽히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라는 부분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 가치인 풍요와 다산을 붙잡은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바로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구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돈을 마음에 붙잡고서 돈을 벌어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를 바라는 삶을 괜찮다고 인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러움 속에서 행복을 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더러움이 문화가 된 이방 사람들의 딸들이 제사장들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남편에게 그것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만족하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날마다 닦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제사장들도 이러한 문화에 먹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으로 가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려야 했던 것일까요?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은 오히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실질적인 이방인과의 단절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모든 제사장들이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혼을 금지하셨던 이유는 선민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물러 터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성전의 생활화를 통하여 내 마음에 소원이 생길 때마다 상번제로 드려지는 번제와 함께 죽는 고백을 생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처음으로 모실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찰싹 달라붙어 있다면 이방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오히려 그 여자를 하나님께로 끌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지성소에 담아둔 대상이 무엇이든지 첫 번째로 담은 대상과의 만남에서 기분과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결정되게 됩니다. 내가 돈을 담고 있는데 돈이 안 벌린다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럴 때에 동창하고 만나서 술을 마실 때에도 돈을 못 벌어 나빠진 기분이 표현됩니다.

그런데 돈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어떠한 문제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첫 번째가 되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반드시 육체와는 무관한 하늘의 기분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를 만나든지 이 하늘 기운을 전하게 됩니다. 기분이 하늘을 만나서 생긴 기분이고, 생각이 하늘을 만나서 생긴 생각이고, 행동도 하늘을 만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가 친구를 강남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끌고 강남 가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친구 따라 강남가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통혼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단순히 결혼에 대한 문제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선민들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어떠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은 영적으로 볼 때에 더러움 속에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울 대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나 무병장수나 자녀의 성공과 형통 승진 성과 등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약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면 그 더러움이 내게 쇄도해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원죄로 인해서 나의 본성도 이 더러움에 대해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지성소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도 세상 가치에 대해 친화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친구가 담배를 피울 때에 같이 담배를 피게 될 확률이 18배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견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에 그들 안에 침투해 있던 이 세상의 더러움이 쉽사리 내 안으로 뚫고 들어옵니다. 그럴 때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지옥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친구가 멋진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 나도 갖고 싶어집니다. 멋진 명품백을 들고 다니면 나도 들고 싶어집니다. 친구 따라 강남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 멋진 차가 티끌 같이 보일 정도로 하나님께서 많이 들어오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명품백이 갖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저 명품백이 옷에 붙은 티끌 같이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많이 들오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장되지 않으면 세상의 더러운 문화가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더럽다는 것은 사람들을 무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런 더러움 가운데 있습니다. 영적인 사실로서의 더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이 청결이라면, 있어야 될 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더러움입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곧 마음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될 지성소이고 이 곳에 다른 것들이 들어올 때에 더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를 끌고 강남으로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서로 따라가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마주보고 돈독한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훌륭하고 행복한 부부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나님께 집중하여 밀착된 상태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두 남녀를 행복한 부부로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부부로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결혼이 첫 번째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통혼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며 인관관계의 기본이 되는 원칙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친구도 따라 가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착관계를 유지하면서 배우자도 만나고 자녀도 만나고 그 밖의 모든 인관관계를 맺어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들을 끌고 가려는 생각을 갖지 않더라도 그들이 끌려옵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될 때에 로마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있었고 기독교인은 단 9%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도 한 때는 전 국민의 25%가 기독교도였던 적도 있었지만 기독교는 점점 더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9%의 교인들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노예로 살 때에 로마 전체를 기독교로 이끌게 됩니다. 아무도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이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사람씩 끌려오다 왕까지 이르러 기독교 국가로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자가 아니라 친구를 끌고 강남 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강남 가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끌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내가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문화나 가치가 무엇입니까? 나도 그것을 부러워하며 살아왔기에 다 아실 것입니다. 그 가치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출발점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고 방향을 하늘로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 마음의 지성소에 담은 이름의 존재를 손에 쥐면서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감으로서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워 기뻐하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따르는 길을 생활 속에서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따르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덧 옆에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내가 가는 길을 따라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친구 끌고 강남 가는 것이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만 한다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자에서 친구 끌고 강남 가는 자로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승천의 길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이 진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문제가 있는 현장마다 예수님만 따라감으로서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을 끌고 강남 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