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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의 약속 대신 하나님을 믿자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2 10:07 · 7,628
성경을 Testament 즉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체가 약속인 샘이지요. 약속이기 때문에 실제 효력이 발생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은총과 축복의 약속들이 어떻게 하면 실제 효력을 발생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제로 삶에서 효력을 나타내게 하는 뇌관이 있습니다. 혹시 약속에 대한 굳센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하나님을 믿자

(에스라 8:21~36)

 

 

21.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 대신 하나님을 믿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하나님을 믿자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말자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으라는 설교말씀을 듣고, 성경 속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함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말자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믿는 대상은 약속이 아닌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도 않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신앙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공급할 것이다. 옷과 음식과 집과 사용할 물건과 필요한 용돈과 성인이 되었을 때에 행할 사업에 필요한 비용까지도 지불하겠다.”라고 쓰고 서명날인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딸은 아버지의 약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약속을 보면서도 마지막 서명날인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면 그 약속을 아무리 읽고 외우고 연구하고 해석해도 절대로 그 일이 자신에게서 일어날 일이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어도 그 서명날인의 이름이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31~34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으로 인한 생의 문제로 인해 염려가 가실 날이 없는 것일까요?

또한 마태복음 1030~31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도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다 마련해 주실 것이고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어서 지켜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명날인 된 약속입니다. 이것을 나의 아버지의 서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생의 근심거리의 80%는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을 한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생활에 대한 염려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실제로 믿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셔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로 느껴지는 그 느낌 이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 느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충만하면 성경의 모든 약속의 말씀이 다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말씀이 성경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성경구절을 붙잡으려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의 말씀대로 은총과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리라는 모든 약속을 믿었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 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걱정과 불안이 있고 두려움과 불편함이 있는 이유는 성경이 반복하고 있는 그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서명날인의 이름이 내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동되는 마음의 차원을 들여다보면 그 구조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내게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대상에 대해서 갖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근거와 내용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의 말씀도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으려하고 성경구절을 달달 외우더라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2차 귀환자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려고 합니다. 거리는 1,500km가 넘고 4개월 이상을 걸어야만 합니다. 장정만 1,773명인지라 가족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노약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과 그 신하들과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않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위해 준비한 많은 예물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에 가장 염려되는 것은 도적떼입니다. 많은 예물을 가진 귀환자들은 도적떼의 밥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에스라도 이 점이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레위인이 없었던 문제는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보충했고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데 막상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성경에 이런 구절이 다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21절을 보면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라고 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구절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게 된 이유가 특이합니다. 22절에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에스라가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지켜주시지만 배반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를 내리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또한 먼저 귀환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었음을 듣고 다시 그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신앙개혁 운동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까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왕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에는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지키시는 분이라고 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를 내리신다고 했는데, 정작 떠나려고 하자 위험하므로 호위병과 마병을 허락해 달라고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기껏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위해서 간다고는 했지만 이러한 말을 듣는 왕과 신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에스라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신도 결국은 이론에 불과한 신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에스라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도 단순한 말 뿐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당신을 찾는 자들을 지키시는데 호위병을 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스라는 좌불안석이 되었습니다. 떠나자니 두렵고 왕에게 마병과 호위병을 구하자니 자신의 믿음에 대한 모순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금식을 선포합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삶을 살다보면 그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확대하면 아이를 학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철따라 옷 한 벌 살 수가 없어서 걱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일도 걱정하지 말고 내일 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하셨지만 염려가 계속 됩니다. 에스라도 그래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고 목사님들은 그 약속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 약속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약속된 내용 맨 마지막에 서명날인의 하나님의 이름이 내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있는 그 많은 약속들이 하나도 믿어지지를 않고 나대로의 삶을 살아가며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쫓기며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라고 합니다. 에스라는 금식을 통해서 어떤 간구를 했고 어떤 응답을 받았던 것일까요? 1,500km의 길을 가는 동안 지켜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던 것일까요?

에스라가 왕 앞에서 한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학적 이론은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받은 응답은 그러한 응답을 다시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지키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들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느낌이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묻고 간절히 원해서 지켜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지켜주실 것은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금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의 모든 약속의 말씀이 실제 삶에서 효력이 발생하려면 내 마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실감해야만 합니다.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잘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에덴을 만드시고 아담을 살게 하신 시점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에덴을 잃었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성경의 모든 약속은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에스라가 행한 금식기도가 이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금식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육체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명예나 인기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들조차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금식은 이러한 육체연관성에 대해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육체연관성에 마음이 매여 있으면 하늘의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금식을 한 것이고 그것이 곧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가 됩니다. 단순히 죽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돈 건강 자식 등의 육체연관성의 문제로 가득 차버린 마음에는 하나님을 채울 수가 없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들이 나와는 무관하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따로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을 뿐인데 이것이 잘못된 기도입니다. 간절하지만 훌륭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미 모든 약속이 다 되어 있습니다. 지키고 보호하시겠다고 하셨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다 공급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염려하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제쳐두고 좁쌀만 한 문제만 생겨도 벌벌 떨고 난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이 분명해지면 이제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선으로 은총으로 복으로 형통케 하심으로 인해 저절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삶이 형통해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이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내 뜻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보면서 왜 내 삶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지 마시고, 그 약속의 말씀에 서명날인의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느낌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안에 들어와서 충만한 상태가 십자가에서 그대로 죽는 것입니다.

마치 나의 마음이 상추쌈 같습니다. 입이 찢어지도록 쌈을 싸서 먹듯이 마음이 세상을 꼭꼭 싸서 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가 금식한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그것들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서 충만해지시면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약속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에스라의 금식 기도는 이러한 효과를 냈었던 것입니다.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기도해서 얻어야 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이미 주어진 약속이 실효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 충만한 내가 끊임없이 죽게 하시고 십자가 붙잡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언약의 내용 전체가 나의 삶에서 실효성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