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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믿음은 의존성의 2단계 로켓_태승철

by 태승철 · 17-02-15 10:12 · 7,687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려면 매우 강한 추진력과 함께 될 수 있는 대로 무게를 가볍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순차적으로 연소가 다 된 연료통을 분리하여 버리는 다단계 로켓이지요. 믿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한 로켓입니다. 특별히 '의존성'이라는 연료를 사용하는 2단계 추진 로켓이지요. 그런데 대부분 1단계 추진에서 중단되는 바람에 하늘의 하나님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은 의존성의 2단계 로켓

(역대하 24:1~27)

 

 

1.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요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3. 여호야다가 그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

 

15.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

16.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은 의존성의 2단계 로켓>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은 의존성의 2단계 로켓

북한이 엊그제 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동해상 500km 지점에 로켓을 발사해서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의 독일이나 프랑스 각국도 난리입니다. 북한 때문에 남한에 사드배치의 명분이 생기므로 중국도 속이 편치 않습니다. 이번에 발사한 미사일은 추진체가 고체 연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색다르다고 합니다. 고체 연료를 사용하면 다단계 로켓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고 곧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거의 도달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중력이 없는 성층권까지 로켓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추진력이 필요하고 또한 무게가 가벼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로켓을 다단계로 분리하도록 만듭니다. 로켓의 무게가 연료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연료통이 다 소모되면 버리고 두 번째 엔진을 가동시켜서 다시 로켓의 추진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고체 연료를 사용함을 통해서 이제 북한이 그러한 기술에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드가 배치된 곳으로 날아가지 않는 한 북한의 미사일은 사드도 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는 진짜 사드는 우리 각자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2단계 로켓을 발사하면 됩니다. 믿음은 2단계 추진 로켓이고 그 연료는 의존성입니다. 세상에서는 독립적으로 자율적인 인격이 되기를 원하고, 의존성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의존적 인격 장애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의존성을 연료로 하는 2단계 추진 로켓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내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도달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의롭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의롭지 않고 불의한 채로 살아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어야 함은 깨끗하게 되고 의롭게 되는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어야만 하나님께 도달하여 만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해서 하나가 되려함입니다.

그 의를 얻게 해주는 믿음은 의존성을 연료로 하는 2단계 추진 로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믿음은 불행하게도 1단계 추진에서 끝나고 맙니다. 1단계 추진체가 바닥나면 엔진을 분리해야 하는데, 이것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2단계가 점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온전한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갖기에 실패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대로 태후 아달랴가 아들 아하시야 왕이 죽자 손자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손자들을 다 죽일 때에 한 살 된 요아스를 고모와 고모부가 성전에 숨겨서 양육을 하였습니다. 요아스가 칠 세가 되자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죽이는 모반을 성공시키면서 요아스를 왕위에 등극시킵니다.

성경에 반복해서 언급되는 대로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요아스 왕이 선정을 베풀고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나옵니다. 훼손된 성전을 중수하고 날마다 번제를 드리며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하에 왕의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갓난아기 때부터 성전에서 제사장 고모부에 의해서 양육을 받고 바른 왕의 통치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모부가 죽자 다른 신하들이 절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고 우상을 섬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방향이 틀어진 뒤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도 말을 듣지 않고, 고모부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던 제사장 스가랴가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생명의 은인이자 부모님과 같은 고모와 고모부의 아들인 고종사촌 스가랴를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소수의 아람군대가 쳐들어와서 요아스가 대군을 이끌고 나갔지만 이들에게 대패하여 심각한 부상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웠다가 요아스는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끝이 납니다.

 

이 본문을 보며 우리에게 궁금증이 생깁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성전에서 제사장인 고모부의 양육을 받고 왕이 되어서도 성전을 수리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요아스가 고모부가 죽자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절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이러한 요아스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2절에서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라고 하였고, 4절에서는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보수할 뜻을 두고라고 하였으며, 14절에서는 공사를 마친 후에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왕으로서 항상 성전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함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전을 보수하고 끊임없이 제사장들에 의해서 번제가 드려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성전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지성소의 법궤 안에는 말씀의 돌판이 있었습니다. 이 돌판은 곧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들어와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들어온 이름의 존재를 손에 쥘 때에 기쁘고 만족해집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닌 권력을 좋아하고 나라의 강대해짐과 외국과의 관계에서 나라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더라면 그것에 대해 번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그가 행하신다, 그의 능력으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던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 통치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아스의 신앙은 여호야다를 의존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신하들이 와서 요아스 왕에게 절을 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아스 왕의 신뢰를 얻기 위해 신하들이 아부한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야다에 대한 의존성을 가지고 있던 요아스는 신하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의존하자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화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제사장 의존성이 로켓의 1단계 추진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단계 추진 장치는 성전 자체에 대한 의존성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생활화하면서도 여호야다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성전 자체를 의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죽지만 성전은 남습니다.

처음에는 성전을 생활화하기 위해 제사장을 붙잡았을지라도, 삶의 현장에서는 제사장이 따라 붙을 수가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스스로 성전을 의존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2단계 로켓이 됩니다. 성전을 삶 속에서 의존함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러나 요아스는 이 지점에서 그만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식으로 가져와보면 제사장은 목사님이고 성전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목사님은 설교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목사는 설교를 잘 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를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성경 창세기 11절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절까지 목사가 설교를 잘해야 된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제사장들이 했던 일은 날마다 똑같이 제사를 드리고 그 의미를 가르칩니다. 그 의미를 가르치는 것도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의 구성 모습과 기구들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이야기가 새로워집니다. 내가 번제로 죽어야 될 이유가 날마다 새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 담기 때문에 나의 죄는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의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아도 새롭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오순절 교회에서 베드로가 행한 첫 번째 설교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해야 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적인 예화로 교인들의 눈물을 빼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며 성경 어느 본문을 통해서도 십자가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만 전담하는 자에 대한 의존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살다보면 마음은 세상의 포로가 되고 먹힌 상태에서 빼내올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사도의 역할이 목사님을 통해서 이루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목사님들이 해야 되는 일은 제사장의 일과 똑같습니다.

번제단에서 죽어야 될 이유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지성소의 법궤에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었던 것처럼 살아계신 인격자를 가리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분향단에서의 기도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하고, 떡 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불러야 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가 되어야 삶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뜻이 밝히 보이는 등대의 의미가 살아나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돈 가족 건강 승진 목회 등의 세상의 가치가 들어있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이고, 이에 따르는 것이 목사에 대한 의존성입니다.

한편 여호야다가 죽은 뒤에도 성전을 의존하며 삶의 현장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없더라도 성전에서는 계속해서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성전을 의존하는 것은 곧 마음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를 의존한다면 부모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듯이, 성전을 의존한다는 것은 성전에 마음을 두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내가 사업장에 있더라도 마음을 돈에 두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은 배우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드리는 것인데 이것이 곧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가지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의존성은 2단계 추진 로켓이 되어서 우리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쏘아 올리는 힘이 됩니다. 2단계 추진 로켓이 발동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목사님들은 첫 번째 단계에 발사체 역할을 하시며 교인들이 의존할 때에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 말씀이 날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마음에서 죄가 새롭게 발동되고 있음을 깨우쳐주면 됩니다.

교인들도 십자가 설교가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죄를 돌아보게 하는 것으로 작용할 때에 오늘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은 옛날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만 드렸던 것처럼 십자가 이야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 의존성이라는 1단계 추진 로켓입니다. 그러한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 십자가를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께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의존성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도달하게 하는 2단계 추진 로켓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의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이 오직 십자가만을 지금의 사건으로 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또한 목사님께 들은 십자가 설교를 삶의 현장에 나가 의존함으로서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께 도달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아름다운 상황이 벌어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