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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티끌대신 처음부터 태산을 노린다_태승철

by 태승철 · 17-01-13 09:56 · 7,445
"티끌모아 티끌이다" 개그맨 박명수의 어록(?)에 있는 말입니다. 티끌을 모으려 말고 자기 자신이나 좋아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결국 더 유익이라는 말이지요.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티끌 아무리 모아도 태산 되는 법 없이 다만 티끌에 머무는 것은 사실입니다. 태산을 원하면 처음부터 태산을 끌어당길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 복음적 의미에서 보자면 태산을 꿈꾸며 티끌 모으기 자체가 죄악입니다. 티끌 모으기의 달인들, 불행하고 참담한 군상들이지요.

티끌대신 처음부터 태산을 노린다

(역대하 6:1~17)

 

 

1.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2.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3. 얼굴을 돌려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서 있더라

4.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5. 내가 내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였으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될 사람을 아무도 택하지 아니하였더니

6.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7.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8.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9.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허리에서 나올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10.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 이스라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11.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노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티끌대신 처음부터 태산을 노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티끌대신 처음부터 태산을 노린다

개그맨 박명수씨를 다 아실 것입니다. 박명수씨가 불쑥불쑥 내뱉는 뜬금없는 말을 사람들이 좋아해서 박명수 어록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개그맨의 말이지만 때로는 삶의 진리의 측면을 말할 때도 있고,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티끌모아 티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찾아보았더니 어떤 가벼운 모임의 짧은 강연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티끌을 모으려 말고 자기 자신이나 좋아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박명수씨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티끌모아 티끌입니다. 돈 몇 푼 모아봐야 친구가 빌려달라고 하면 다 날립니다. 그 돈을 자기 몸에 투자하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투자한다면 나중에 저처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박명수씨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고 김진표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 사람이 이렇게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니 참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저는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러한 저에게 이 말은 굉장한 반전이 있는 말입니다.

노자의 무욕이 대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티끌에 대해서 무욕 하라는 말이고 본래 의미는 자연에 일치하는 삶인 무위자연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박명수씨의 말을 노자의 말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태산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태산을 노리는 자가 티끌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논리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일확천금을 노리라는 말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티끌모아 태산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금융업에 종사하시는 집사님에게 들은 말인데 통계적으로 가장 건전하고 확실한 재테크의 방법은 티끌을 저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도 티끌모아 태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사 거의 모든 방면에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통합니다. 삶 자체에 의미를 두고 주어진 것에서 성실하게 작은 것들을 모으다보면 어느새 깜짝 놀랄 만큼이 모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은 마음을 채움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데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채우려면 처음부터 마음 크기의 태산을 노려야 합니다. 작은 것들을 아무리 모아봐야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이제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하였습니다. 그러자 성전에 구름이 가득차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솔로몬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경험합니다. 그 뒤에 솔로몬이 백성들을 모아서 경축기념연설을 하고 백성의 중보자적인 위치에서 성전봉헌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넘어야 될 관문으로 1절과 2절에서 주의를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42절까지 이어지는 솔로몬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고 통과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라고 하였으나, 그 뒤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 한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표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거하실 곳이라고 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한 장소로서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 이런 말을 하셨는지 혹시 아십니까? 성경에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더욱 이상합니다.

캄캄한 곳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짙고 빽빽한 먹구름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임재 하셨을 때에 모세를 먼저 만나시고 말씀을 주신 뒤에, 제사를 드리고 몸을 정결하게 하고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 칠십 명을 데리고 올라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 때에 10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언제 캄캄한 곳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일까요? 또한 계시록 42~3절을 보면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나님을 뵈올 때의 느낌을 이 세상의 언어로 보석 빛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93절에서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하는 모습들에서 어두움은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1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드러난 사도 바울의 영적 세계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육체가 거하는 땅의 차원이 있습니다. 한편 마음은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차원에 있습니다. 또한 그 위에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차원에 거하는 우리의 마음을 공백이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언제나 흡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채울 수 없다면 모든 불행의 근본적 뿌리와 이유가 됩니다. 내가 불행한 이유는 돈이 없거나 몸의 병 때문이 아니고 자식이 말썽을 피워서도 아니고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흡입력이 작용하는데, 이 흡입의 방향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향할 것인지 육체가 있는 땅으로 향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이 세상 것들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판단하게 될 때에 마음은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빨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빨아들이는 힘을 종족번식의 욕구로 보았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이 힘을 성적충동(Libido)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그 힘의 원천이 성적욕구라는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그 힘을 돈에 대한 욕구로 보았고, 니체는 권력에 대한 욕구로 보았습니다. 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음이 육체의 세계로 흡입구를 돌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하늘과 마음의 사이는 막히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1절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은 도달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흑암과 같이 단절 된 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의 흡입구가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빨아들여서 마음의 공백을 메우려고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흑암 가운데 계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세계관이 굉장히 중요하고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요즘에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화제인 가운데 객관적인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뿐만 아니라 국정기조를 결정하는데 최순실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또한 외국에 나가서도 최순실이 찍어준 핵심을 가지고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상태가 그러합니다. 마음은 육체에 묶였고 육체 의존적이 되었습니다. 육체에 의한 마음농단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에 육체로 만날 수 있었던 것들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영원히 마음이 빈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인데 이것이 곧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을 동안에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육체가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육체가 죽게 되면 그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채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지옥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의 채워짐을 느끼지 못할 때에 지옥을 느낍니다. 나의 마음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던 애인이 배신할 때에 마음을 채울 수 없음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자녀의 일이 엉망진창일 때 마음을 채울 수 없으므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자식의 일이 잘못되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은 아이의 잘못을 고치고 생명의 길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형통한 모습만을 그리던 나는 그로 인해서 내 마음이 채우지 못하게 되고 지옥의 삶을 맛보게 됩니다.

마음은 참 희한합니다.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육체에 의존해서 마음을 채우려고 한다면 육체로 만나는 모든 것은 다 티끌에 불과하게 됩니다.

요즘 대한민국이 시끄럽습니다.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시끄럽고 물가도 엄청나게 올랐는데 국가의 발표는 1%밖에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구 안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티끌 같습니다. 지구도 태양계 안에서 작은 행성입니다. 은하계 안에서 티끌이고 은하계 자체가 우주 전체에서는 티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이지만 무한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은 미국에 있는 애인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고 미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주가 아무리 커도 시간과 공간의 차원인데 마음은 시공을 초월함으로서 우주로도 채워지지 않는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래 시공을 초월하게 만들어졌는데 육체에 묶임으로서 마치 바보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로 만드신 이유는 시공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 들어가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한 하늘의 차원에 계시기 때문에 그 차원으로 마음이 가려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강릉에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LA로 갈 수도 있고 아르헨티나로 갈 수도 있고 유럽의 에스파냐 바닷가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애인이 갔다든지 자식이 갔다든지 내 돈이 거기에 있는 은행에 있다든지 가야할 이유만 존재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게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졌습니다.

 

요즘 재벌들이 청문회로 불려 가는데 재벌들 재산도 시공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 티끌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라고 하는 것은 원래부터 시공을 초월할 수 없는 마음이 된 것처럼 육체의 농단에 지배되고 육체로 만나는 것들로만 마음을 채우려고 이 세상 것들을 구걸하다시피 전전긍긍하면서 티끌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육체에 묶여 있는 마음 앞에 성전을 지어놓으셨고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체로 만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그것들의 이름을 붙잡고 손에 쥐려고 뛰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냥 입으로 부르고 생각으로 떠올리면 되는 게 아니라, 성전에 있는 지성소의 모습과 성소의 모습과 그리고 번제단과 물두멍을 생각하며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만나는 것들을 마음이 붙잡고 있는 상태를 번제단에서 죽이고 지성소의 법궤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이름만 붙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돈을 붙잡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상태를 번제단에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그동안 공중과 하늘 사이에 막혔던 먹구름을 뚫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흑암 가운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중에 있는 마음의 흡입구에 육체라는 빨대를 끼워서 육체에 포착되는 대로 빨아들이면 티끌모아 티끌입니다. 해결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원래 타락 전에는 공중에 있는 마음의 흡입구를 곧바로 하늘로 향해서 하나님을 쭉쭉 빨아들여서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 몸이 움직여지고 생각이 채워지면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육체를 빨대로 삼아서 마음을 채우려고 하다 보니 아무리 빨아들여도 빨아들여지지도 않고 빨아들인다 해도 티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물리적 차원을 초월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리적 차원의 것으로는 채워지질 않습니다.

티끌모아 티끌은 티끌을 모아서 마음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것이 죄악입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돈에 적용하면 성실한 사람이지만 마음에 적용이 되면 이게 바로 죄악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그 어떤 것도 아무리 많이 모아도 티끌에 불과한데 마음을 채우려면 처음부터 태산이신 하나님을 공략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노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으므로 십자가 빨대로 하늘을 향해 하나님을 빨아들이면 이 세상의 삶은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또 하나님을 빨아들이느라 정신없는 상태에서 돌아보면 삶의 모든 환경이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고 이끌려 갈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만나는 티끌들을 모아서 마음을 채우는 자들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늘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태산이신 하나님을 마음 안으로 모셔 들이도록 허락된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성전건축을 통하여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신 의미를 가르쳐주셨고 이제 티끌모아 태산을 이루려는 망상을 접고 곧바로 태산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마음의 흡입구를 갖다 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