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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도망자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_태승철

by 태승철 · 16-12-01 21:46 · 7,528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뻐꾸기 둥지'란 정신병원을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주인공 맥 머피는 감옥살이를 하다가 더 편한 환경을 원해 미치광이 시늉을 하여 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이와 비슷하게 블레셋 왕과 방백들 앞에서 미치광이 시늉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던 도망자 다윗도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거처로 허락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외 추방 된 도망자요 미치광이 시늉자인 다윗의 둥지 시글락으로 날아간 새들이 있었습니다.

도망자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

(역대상 12:1~40)

 

 

1.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2.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3. 그 우두머리는 아히에셀이요 다음은 요아스이니 기브아 사람 스마아의 두 아들이요 또 아스마웻의 아들 여시엘과 벨렛과 또 브라가와 아나돗 사람 예후와

4. 기브온 사람 곧 삼십 명 중에 용사요 삼십 명의 우두머리가 된 이스마야이며 또 예레미야와 야하시엘과 요하난과 그데라 사람 요사밧과

5. 엘루새와 여리못과 브아랴와 스마랴와 하룹 사람 스바댜와

6. 고라 사람들 엘가나와 잇시야와 아사렐과 요에셀과 야소브암이며

7. 그돌 사람 여로함의 아들 요엘라와 스바댜더라

 

 

오늘 본문 중심으로 <도망자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도망자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

미국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뻐꾸기는 자기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위탁양육을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병원은 환자들을 위탁받아서 돌봅니다.

범죄자인 주인공 맥머피는 노동형을 선고받아 작업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더 편한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 꾀를 냅니다. 그래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서 말썽을 일으키자 정신병원에 위탁됩니다. 정신병원으로 가면 더 편할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수간호사를 중심으로 억압의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스템에 항거하다가 전두엽이 제거되는 수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되고 마는데 이 영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여러분도 쉽게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울로 말미암아 도망하고 피신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옵니다. 다윗은 초기에 블레셋으로 피신했을 때에 블레셋 왕 아기스와 방백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대문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려 미친 척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부지합니다. 도망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400~500명에 이르게 되자 결국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할 수 없게 된 다윗이 결단을 하고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가서 머물 곳을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한편 아기스 왕은 한 때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추앙 받던 다윗을 자기 그늘 아래에 둠으로 이스라엘 내부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는 마음으로 다윗에게 시글락 성읍을 내줍니다.

본문에서는 이 시글락에서도 다윗에게 오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온 이야기를 하며 지파별로 명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22절까지 이야기가 되고 하반부의 23~40절까지는 시글락에서 도망자 생활이 14개월 동안 진행되는 가운데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되어 칠년간 통치하게 됩니다.

이 칠년 동안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우고 나머지 지파들을 통합하여 다스렸으나, 정권이 무너지게 되고 지파의 대표들이 와서 다윗은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이렇게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별로 대규모의 병력들이 모여서 다윗의 상비군을 이루게 되는데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봅니다.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며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에스라의 족보 신학은 탁월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 주는데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서 나온 삼십인 용사의 명단과 비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 때에 모였던 용사들과,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전체 왕이 되었을 때에 모였던 용사들이 언급되는데 이들이 앞서 나온 삼십인 용사의 명단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앞의 명단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윗의 입장에 서게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 왕이 되어서 제대로 된 신정 국가를 세워나가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대사는 혼자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을 모으고 규합하여 적절하게 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할례 의식에 충실하고 성전 영성으로 일관된 삶을 살며 중차대한 나라세우는 과제 앞에서 하나님을 끌어안자 하나님께서는 삼십 인의 걸출한 영웅들을 모으셨고, 다윗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목숨을 건 충성심까지도 바치도록 만드십니다. 이처럼 다윗을 통해 이루시려는 신정국가의 건국을 하나님 스스로 진행해 나가십니다.

우리도 살면서 크고 작은 일을 행해야 될 위치에 설 때가 있고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을 끌어안기에 몰두하면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위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시고 그들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실 것임을 앞선 삼십인 용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다윗이 시글락과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을 때에 모인 사람들의 명단과 지파별 숫자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모여드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합니다. 같은 명단이더라도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삼십인 용사 때에는 우리를 다윗의 입장에 세우셨고 오늘은 다윗에게로 가는 사람들의 입장에 세우십니다.

시글락에서 모인 사람들과 헤브론에서 모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글락에서 머물던 다윗은 세상 말로 하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국외로 추방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여전히 사울은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거처를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는 암울한 처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도피자의 둥지인 시글락으로 날아든 새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헤브론에서는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자 각 지파에서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병사들이 모여듭니다. 이제는 암울한 도피자의 시절이 끝나고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서 칠년을 통치한 뒤에,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고 각 지파의 대표들로 하여금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으므로 핑크빛 미래만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각 지파가 수천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보내어 상비군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다윗이 이룰 신정국가의 건립이라는 장밋빛 미래에 참여하기 위하여 보내진 자들이었습니다.

시글락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윗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던 상황에서 모인 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삼십인 용사의 명단이 있었고 헤브론에서 군대가 결성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보고 온 사람들과 도망자의 둥지로 날아온 새들은 완전히 의미가 다릅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자 모형이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주로 찾으면서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까? 시글락의 다윗의 모습이 우리가 찾아야 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헤브론의 다윗을 찾았던 수많은 군대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의 대에서 다윗 왕조에 등을 돌리고 다시금 북 왕국 이스라엘로 결집합니다. 다윗에게서 장밋빛 미래를 보고 와서 연합했지만 결별을 예약하고 온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글락에서 불투명한 미래의 다윗에게 모였던 사람들은 세상적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만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고 다윗만이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예언을 듣고도 다윗에게서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모였습니다. 반면에 세상적으로 암울했던 다윗의 현실을 눈여겨보았던 사람들은 그저 국외 추방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공생애 때에 기적을 일으키시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님만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예수님과의 결별을 예약한 임시적인 만남이고 연합입니다. 몰려왔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솔로몬 이후에 떨어져나가서 북 왕국을 세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이 지금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시글락의 다윗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도망자로 머물던 다윗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상적으로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도 다윗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의 모든 성과를 이스라엘에 놓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찾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아 가는 것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세상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시고 추방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나도 이 세상에서 이룬 것과 이루고 싶은 것들을 등 뒤로 해야만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나아갈 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러한 연합은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의 모습만을 알았던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때에 다 무너져 갔습니다. 공생애의 목적도 제자들의 마음을 십자가로 끌고 가시기 위함이었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채 십자가의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칩니다. 나중에 성령님을 통해 진정한 십자가를 끌어안을 수 있었을 때라야 진정한 사도이고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주실 수 없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빠져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어제 이러한 질문을 했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의 핵심은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복음은 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지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대해서는 추방된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서 추방된 사람처럼 되고 국외자가 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들은 동시에 가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와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는 국외자가 되고 추방된 자가 되고 도망자가 되어야만 예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브론에서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의 모습처럼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오셔서 사람들을 모으셨다면 각 지파에서 수만 명씩이 모였던 것처럼 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수님을 그런 모습으로 둔갑시켜서 전파하고 맞아들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수님은 없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려면 세상의 가치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인간 세상으로부터 시글락의 다윗처럼 국외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가치에 대해 침을 흘리는 마음으로부터 추방되어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오늘 에스라도 도망자에게로 날아간 새들처럼 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방식대로라면 이들에게 신앙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복음은 전파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뜻하지 않게 성령의 이야기가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 그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된다고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돈을 벌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다른 방법으로 줄 수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건강 미모 승진 같은 가치들을 조건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세상의 가치를 조건 삼아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만족과 기쁨과 행복임을 일깨워주면서 그 조건들 없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진짜 길인 십자가를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돈을 얻었을 때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만족과 기쁨을 돈이 없어도 갖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다윗에게 아마새가 찾아왔을 때에 성령이 임하시며 다윗 위에 설정되어 있는 하늘의 계획을 보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을 보는 자들이 십자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헤브론의 왕으로서의 다윗이 아닌 시글락의 다윗입니다.

다윗에게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시글락에서부터 따른 자들이 있었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을 때부터 따른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지점으로 가야할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시글락의 다윗에게 찾아간 이들만이 하늘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 것을 아무것도 주실 수 없는 예수님께로 가서 하늘을 보는 자들이 그 동안의 착각을 깰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은 돈을 벌고 건강 해야만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지만 이제는 하늘을 통해서만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자들이고 도망자의 둥지로 날아가는 새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가는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나가면서 세상의 국외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용기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