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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사람 다루는 기술, 교인 다루는 기술_태승철

by 태승철 · 16-11-30 10:02 · 7,444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태양 아래 그 어느 것보다 값비싼 능력이다" 20세기 이후 모든 자기계발서의 뿌리라고 하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 신앙의 색깔만 입히면 곧장 '교인을 다루는 기술'로 써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혹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도 나름대로 사람을 다루고 교인을 다루는 기술에 대해 오리지널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다윗의 사람관계를 통해서 그 해답을 시도해 봅니다.

사람 다루는 기술, 교인 다루는 기술

(역대상 11:10~47)

 

 

10.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우두머리는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15.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람 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6.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18.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19.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람 다루는 기술, 교인 다루는 기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람 다루는 기술, 교인 다루는 기술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태양 아래 그 어느 것보다 값비싼 능력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맞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삶의 내용이기에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탁월하면 이보다 큰 능력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스펙을 많이 따집니다. 누군가가 외국어를 굉장히 잘 하는 능력이 있는데 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이용할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돈을 버는 능력이 없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돈이 내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어도 대통령을 올라탈 수 있다면 대단한 능력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이 시끄러운 이유도 이러한 능력자 때문입니다.

앞서 나온 말은 인간관계전문가인 데일리 카네기의 저서인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1936년에 출간된 이래 무려 6천만 부가 팔린 책이고 지금도 팔리고 있는데 20세기 이후 모든 자기계발서의 뿌리로 봅니다. 우리 눈에 띄는 모든 자기계발서들은 이 책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인간관계의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 했습니다.

첫 번째는 꿀을 얻으려면 벌통을 걷어차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을 벌통으로 비유를 했는데 참 적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면 벌처럼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칭찬은 무쇠도 녹인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나온 책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들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자기계발서들은 이 세 가지 원칙에 의해서 기록되어지고 저술되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저자는 이런 원칙 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뭔가를 시키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그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또한 이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잊고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라고 합니다.

데일리 카네기의 탁월한 통찰로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볼 틈이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실패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제가 요약해보면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비판대신 칭찬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원하는 것을 알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를 보여주어야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동을 하도록 움직이게 하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이 땅이 아닌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만 유효합니다. 복음은 돈 벌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기 위해서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형통이나 승진을 위해 혹은 건강하기 위해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 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그렇게 갖기를 원합니까? 침을 흘릴 정도로 탐이 나는 이 세상 것들을 등지고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자들이 누구이기에, 그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길을 가르쳐 줌으로써, 움직이게 하는 사람다루는 기술의 핵심 원칙을 복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듣게 해주려면 복음의 근본 목적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곧 하나님 외의 이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제 하나님만을 갈망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승천하심은 우리도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뜻합니다. 이렇듯 복음은 하나님을 갖는 일에만 유용합니다.

그런데 정작 아무도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동을 하도록 움직이게 하려면 복음의 목적을 왜곡시켜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돈 벌 수 있고, 건강할 수 있고, 형통할 수 있고, 승진할 수 있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복음은 이렇게 바뀌어져 왔습니다.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에 신앙의 색깔을 덧입혀서 교인을 다루는 기술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교회에 나오게 해서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던져주었던 것인데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있지만 교회다운 교회가 없어지고 있는 형편이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모든 정복전쟁에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국건설에 크게 이바지했던 다윗의 용사들과 몇몇의 두드러진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십인 용사 중에서도 첫째 세 용사가 있습니다. 이 똑같은 명단이 삼하 23장에는 야소브암과 엘르아살과 삼마가 나오는데 본 장에서는 삼마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습니다. 삼총사가 두 그룹이 있는데 두 번째 세 용사들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이들이 다윗과 함께 블레셋에 대해 진을 치고 있을 때에, 다윗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 상황을 한탄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베들레헴 우물물을 떠서 다윗에게로 가져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서 떠온 물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드리는데 이렇게 나오는 다윗의 삼십인 용사의 명단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주석서를 봤더니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윗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은 최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고, 둘째 다윗의 지도력이 있었으며, 셋째 신하들의 협력과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다윗이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과제를 붙잡자 하나님이 도우셨고, 그 지도력을 따라서 충성어린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으로 봅니다. 이런 말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고 주석에서부터 기독교는 사라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 삼십인 용사의 명단과 몇몇의 활약상을 기록하면서 에스라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예루살렘 정복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로 영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윗이 소년 목동시절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골리앗을 죽이고 피신생활을 거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칠년을 통치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통일왕국의 왕이 될 때까지의 내용들은 생략하고 예루살렘 정복으로 바로 연결을 시켰습니다. 이 생략된 기간을 관통하는 것은 곧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성전의 영성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의 성전 영성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아브람 때부터 맺어진 선민의 할례 의식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할례 의식은 눈앞에 누가 있든지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지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더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마음이 아기가 엄마를 끌어안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를 전제로 할 때에 삼십인 용사의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라를 세워나가야 될 왕의 위치에 선 다윗은 왕의 책무보다도 할례 의식에 충실합니다. 골리앗 앞에서도 먼저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골리앗에 대한 생각으로 다윗은 움직일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할례 의식에 충실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 영성을 유지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은 국가 통치라는 과제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국가를 세우고 통치하는 일이 혼자되는 일은 아니고 뛰어난 조력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할례 의식에 충실한 다윗은 성막에서 상번제가 드려지듯이 매일 같이 하나님을 붙잡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조력자들과 협력하고 사람 관계를 어떻게 맺어갈 수 있느냐는 것인데 에스라는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국가 통치라는 과제를 중심에 두자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고 조력자들이 모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 통치라는 과제 앞에서 다윗의 마음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국가라는 조직에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삼십인 용사를 모아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삼십인 용사의 충성심이 반드시 신앙에서 우러나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의 군대의 총사령관인 요압이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과 처음부터 함께하며 모든 전쟁을 수행하고 국가를 세워 나가는데 요압은 나중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됩니다.

다윗이 중요한 국가정책을 세울 때마다 요압이 다윗의 의중과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사실 다윗의 조카였음에도 이 세 명의 세력이 너무 커지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보자면 요압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볼 수 없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업을 수행하실 때에 열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상태 또한 요압과 다름없었습니다. 자기 이권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인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 빌라도, 대제사장들도 예수님의 인류구원이라는 대업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할례 의식에 충만하고 예루살렘의 성전 영성을 유지할 때에 사람과 관계할 여력은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을 때에 원수의 형태이든 동역자의 형태이든 부하의 형태이든 충성심의 형태이든지 다른 그 어떤 비판의 형태로든지 이들을 동원하셔서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다윗은 국가 통치라는 과제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셔서 사람들을 동원하십니다. 이 삼십인 용사 중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까지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끌어 모아서 다윗을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세 용사들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떠오자 다윗은 그 물을 혼자 마시거나 나눠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피 같은 물을 동료들과 나누며 전우애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결을 도모하고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을 다 여호와 앞에 쏟아 붓습니다. 다윗의 마음에서는 여호와께 드린다고 쏟아 부었지만, 세 사람이나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납득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에는 하늘로 향한 길이 나있었습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충성을 할지라도 다윗은 이들의 충성을 하늘로 돌려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충성심은 다윗에게 머물지를 못하고 하늘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도달하게 하는 중간 통로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목회할 때에 사람 관계의 기술은 중요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목사의 관심이 부족할 때에 삐쳐서 나가는 분들까지도 있습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전화도 하고 전도사님들이 찾아가기도 하고 부목사님도 찾아가보다가 정 안되면 저에게까지 연락이 옵니다. 그러면 제가 찾아가서 말씀을 드려보지만 그래도 나갈 분은 나가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분들은 서운해 할 만 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 떠나고 남는 분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교인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기술로 처리해 나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할례 의식에 충만해서 성전의 영성으로 살아가다 보면 인간관계를 해나갈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를 세 가지 형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끌어안기 위해서 여력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업고 가시고 백허그를 하십니다.

다윗을 백허그 하실 때 다윗의 눈앞에 있는 국가 통치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해나갈 것입니다. 다윗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백허그로 움직여 가십니다. 다윗의 주변에 있는 조력자의 여러 가지 일들은 하나님이 등에 업고 가십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할례 의식에 충만해서 성전 영성을 통해서 하나님 끌어안기를 전념하면 원수들이 눈앞에 와도 조력자가 눈앞에 와도 비판하는 자가 와도 칭찬하는 자가 와도 결국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도모하시면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촉한의 1대 황제가 관우와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삼고초려로 제갈공명을 군대의 모사로 받아들인 것 같이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사를 도모하려는 의중이 다윗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국가를 하나님께서 건설해 나가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간관계가 삶의 내용입니다마는 모든 인간 앞에서 하나님 끌어안기에 전념하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모이는 모든 인간을 섭리하시는 역사가 오늘 하루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