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삶을 게임하니까 십자가가 필요없다_태승철

작성일
16-10-21 09:31
작성자
태승철
조회
7,782
우리의 생은 삶입니까? 게임(Game)입니까? 게임이 뭘까요? 일정한 규칙을 따라 두 명 이상의 참여자가 경쟁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활동입니다. 게임을 게임 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은 특성은 바로 이 게임 활동이 기쁨을 향한 굶주림이라는 점이며, 그래서 지극히 사탄적입니다. 반면에 삶은 이미 얻은 기쁨으로부터 출발해서 세상에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고요, 사탄적인 인생게임에 빠져 있음의 증거는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삶을 게임하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다

(열왕기하 16:10~20)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삶을 게임하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삶을 게임하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다

삶을 삶으로 살지 않고 컴퓨터 온라인 게임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십자가 노래를 부르면서도 생활화를 하지 않는 이유도 삶을 게임하기 때문입니다.

게임(Game)’이란 단어를 사전에서는 규칙을 정해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에 맞추어서 뜻이 유지되도록 말을 바꾸어 보면 일정한 규칙을 따라 두 명 이상의 참여자가 경쟁적으로 목표를 이루려는 활동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규칙이 있고 규칙대로 이루어야 될 목표가 있으며, 참여자들은 이 목표를 경쟁적으로 이루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막고 내가 먼저 목표에 도달하거나 많이 도달하는 것이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인생을 삶으로 살고 있느냐 게임으로 살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삶과 게임이 어떻게 구분되느냐는 것인데 기쁨에서 출발하면 삶이고 기쁨을 향해서 가는 것은 게임입니다. 그리고 게임으로 삶을 사는 것은 지극히 사탄적이고 타락의 징후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살아가는 악마적인 것입니다.

원래 창조 시부터 하나님의 생각과 개념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의 삶의 장소는 기쁨의 의미를 가진 에덴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이 피조 세계에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들여놓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향해 마3:17절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하나님을 내 사랑하는 아버지요 내 기뻐하는 자이십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 전의 인간은 주님이 아버지로 기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기쁨은 만족이 지속되어 표현되는 것인데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개념 속에서 인간에게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이고 우선적인 것인데 하늘기쁨을 마음에 채우고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을 바라셨습니다.

타락 전에 하와가 아담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면 그 행위는 기쁨의 본질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또한 하와가 아담에게 여보! 오늘 영화 보러 가자라고 했어도 그것 또한 기쁨의 표현입니다. 영화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기 때문에 영화도 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자 하나님과 결별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마음이 비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마음이 빈 상태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울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분노나 화병으로 나타나며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됩니다.

본래 창조주 하나님의 개념 속에서의 기쁨은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질 때에 생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타락 이후에는 기쁨이 채워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는 사람들끼리의 약속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에덴에서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렸는데, 쫓겨나고 보니 마음에 채울 거리가 없기 때문에 사탄의 말대로 우리의 판단력으로 인간 사회 속에서 기쁨거리를 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 기쁜 것이다라고 약속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 규칙에 따라서 그것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고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진 사람은 따라 잡히지 않으려고 더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잃은 인간들은 기쁨거리를 돈 권력 높은 지위 등으로 약속하게 되면서 에덴 밖의 삶은 게임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게임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골입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에 골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에 대해 11명의 움직임에 관한 공격 작전을 세우고 반대로 상대방에게 골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수비 작전을 세웁니다. 최고의 가치인 골을 위해서 모든 활동이 규제되기도 하고 서로 경쟁을 위해서 규칙을 정하는 것인데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렇게 본래의 기쁨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탄의 권고와 충고를 받아서 우리끼리 기쁨거리를 정해놓고 인생 게임을 하게 되는 게이머가 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개념 속에서의 삶은 하늘에서 얻는 기쁨인데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얻은 기쁨 충만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도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만들어진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녀와 대화하고 관계하고 양육하는 모습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웃을 만나도 이웃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기쁨으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서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게임이 되어서 인간 사회에서 정해 놓은 가치의 기쁨을 얻기 위해 경쟁적인 삶을 사는 게이머가 되었는데 그 증거가 절대로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게이머들은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이야기를 아하스 왕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북 왕국과 아람은 반 앗수르 전선을 펼치기 위해 동맹을 맺고, 그 동맹에 남 왕국을 강제로 가담시키기 위해 침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의 아하스 왕은 친 앗수르 정책으로 이들에게 맞섭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온갖 예물을 앗수르 왕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자, 앗수르 왕이 북 왕국과 아람의 동맹군을 대파하고 그 결과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점령하여 지금 머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전쟁에 나갈 때에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을 병거에 싣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 제단에 제사를 드림으로서 자신들의 신의 힘이 전쟁에 동원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 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이 고마워서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는데 앗수르 왕의 제단을 보고 굉장히 인상 깊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제단의 식양대로 그린 설계도를 우리야 제사장에게 보내서 그대로 만들게 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우리야가 앗수르 식의 제단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번제단을 북쪽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그곳에 앗수르 식의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본래 번제단에서 드리던 모든 제사를 앗수르 식의 제단에서 드리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15절 마지막 부분에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라고 합니다.

놋제단은 본래의 번제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번역이 조금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데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주께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원어 그대로 옮겨보면 이 놋제단은 내게 생각해볼 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더 생각한 뒤에 조치하도록 하겠으니 지금은 저 북쪽 편에 가져다 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로서는 이 본래의 번제단을 어디에 써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인데 번제단의 용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번제단과 앗수르 식의 제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번제단은 십자가 번제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성전의 번제단의 사용 용도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용도폐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것도 아하스 왕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죄 사함에 대한 설교나 전도할 때나 부활절 전 고난주간에나 가끔 십자가를 말할 뿐, 그 외의 일상생활에서는 십자가를 생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하스 왕처럼 십자가의 용도를 알 수 없고 용도폐기가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용도는 오직 죄 사함 받고 나서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티켓을 확보하는 데에만 사용할 뿐 그 외의 모든 시간에 대해서는 번제단을 북쪽에 치웠던 것처럼 치우고 살아갑니다.

번제단은 말씀드린 대로 지성소의 구성을 따라서 내 마음의 지성소를 진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인간 사회가 정한 기쁨거리로서의 가치를 담게 된 인격을 죽이는 용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마음의 지성소에 담게 되면 생각과 느낌과 모든 것이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와서 인격의 특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격자체가 번제단에서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마음의 지성소에 본래의 가치이신 하나님을 담아 기뻐하면서 인간세상의 삶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번제가 아침과 저녁으로 드려졌던 것도 내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서 장사를 하고 살더라도 내 마음의 지성소에는 돈이라고 하는 인간세상에서 기쁨거리로 정해놓은 가치가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지금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죽어야 함을 깨닫도록 함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게임이 아니라 본래 계획하셨던 모습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셨는데 번제단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 식의 제단은 인간들이 약속해놓은 기쁨거리의 가치를 마음의 지성소에 담고 그 가치가 담긴 상태를 확정지어 버립니다. 마음이 그렇게 확정된다면 남들보다 더 많이 얻기 위한 경쟁적 게이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내 힘이 부족하면 신을 창조해내고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뇌물을 바칩니다. 앗수르 식의 제단은 이처럼 게이머들이 신의 힘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이 폐기되고 앗수르 식의 제단이 등장하게 된 것인데 기쁨거리를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세상이 약속해 놓은 돈 건강 장수 부흥 승진 인기 등의 것들은 본래 기쁨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에게 설득된 인간들이 그것들을 기쁨거리로 정해놓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축구경기장이나 농구경기장처럼 게임의 경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정해놓은 골을 향하며 누가 먼저 쟁취하느냐를 따지는 게임장이 되어버리자, 제사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닌 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세상에서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타락 이후에 세상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도록 게이머로 변질시키는 시도가 얼마나 집요하게 끈질긴지 모릅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 우리야가 이 모든 배교 행위를 앞장서서 준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우리야는 이사야서 82절에 보면 하나님께 정직한 자라고 칭찬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지독한 배교 행위를 하여 성전 안의 번제단을 치워버리고 앗수르 식의 이방 제단을 만들어서 가져다 놓게 된 것일까요?

그 누구라도 성전의 지성소의 설계와 구성을 보며 내 마음의 지성소를 진단하는 것을 계속하지 않는 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인간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 인간들끼리 약속한 기쁨거리를 추구하고 있는가, 그것 때문에 지금 슬퍼하거나 걱정하고 있는가, 그것을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고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진단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부지불식간에 세상적인 게이머의 길로 흘러들어가게 되고, 제사를 드리면서도 제사의 성격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그런 얘기합니다. 교회에서 수고하고 충성하며 봉사하는 분들에게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분들 대답이 십중팔구는 제가 복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당신이 내게 인사할 것 없다는 뜻인데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충성과 봉사가 앗수르 식의 제단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충성과 봉사가 기쁨과 만족과 복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내 안에 하늘에서 만들어진 기쁨이 들어와서 그것이 표현되는 과정이 충성과 봉사로 나타나야 하는데, 충성과 봉사를 함으로서 앞으로 만족할 기쁨거리를 얻으려 하는 것은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앗수르 식의 제단을 성전 안에 들여놓는 것임에도 공공연하게 이러한 설교가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교인들은 배운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복을 주시고 기쁨거리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쁨거리조차도 인간 사회에서 약속된 것들인데 이것은 아하스 왕이 성전 안에 앗수르의 제단을 갖다 놓은 배교 행위와 같습니다.

인생을 게임으로 사는 자들은 십자가를 생활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기쁨거리로 약속해놓은 가치를 담은 상태를 고착시키고 확장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세상의 기쁨거리들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고 그런 내가 죽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현장에서도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기쁜 상태에서 장사를 할 때에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사는 사탄의 놀음이 되고 기쁨을 얻기 위한 게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 생활화를 잃어버린 이유도 사탄의 게임에 참여한 게이머가 되었기 때문인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늘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하늘기쁨을 드러내는 오늘 하루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게이머의 자리를 벗어나 참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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