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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파워게임의 절대적 승리의 법칙_태승철

by 태승철 · 16-10-20 09:57 · 7,660
글로벌 강대국 간에, 국회에서 여야 간에, 기업에서 노사간에, 가정에서 부부 형제 부모 자식 간에, 심지어 연인들 간에 파워게임은 없을 날이 없습니다. 이 게임에 나 역시 참여하고 있고 혹시 나 자신은 힘을 겨룰 심정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파워게임의 현장 안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경우마다 승자와 패자가 결정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상대적인 승리일 뿐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피할 수 없는 파워게임의 현장에서 절대적 승리의 법칙을 찾아봅니다.

파워게임의 절대적 승리의 법칙

(열왕기하 16:1~9)

 

 

1.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 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2.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6. 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파워게임의 절대적 승리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파워게임의 절대적 승리의 법칙

파워게임에서 절대적인 승리를 이끄는 법칙이 있다면 상대적인 승리를 이끄는 법칙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결국 파워게임에서 이긴 자들의 환호성과 진 자들의 통곡 때문입니다. 승리를 얻고 패배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에 세상은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집니다.

글로벌 강대국 간에 파워게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이나 일본 은 해양세력으로, 러시아와 중국은 대륙세력으로 파워게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중국해나 시리아에서도 그렇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후임자를 놓고 러시아와 중국과 미국이 파워게임을 벌였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부사이 부모자식 사이 심지어 연인들 사이에서도 파워게임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힘겨루기를 전혀 원하지 않을지라도 상대방은 나를 파워게임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므로 평화로운 상황에서 관계를 맺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파워게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굴복하고 종속될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파워게임 현장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굴복되지 않고 어떻게 절대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선민에게는 이 파워게임에서의 절대적 승리가 신앙의 진위여부를 결정합니다. 진짜 신앙인이면 이 세상에서의 파워게임에서 무조건 승리를 얻어야 하는데 상대적인 승리가 아니라 절대적인 승리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승리와 상대적인 승리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또한 절대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를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주안점을 두고 봐야할 것은 파워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결정적인 요인이 파워동원능력입니다. 나는 힘이 없더라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크면 클수록 유리해지고 승패에 향방을 결정하는데 어떻게 힘을 동원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은 주인공인 아하스 왕이 파워게임에서 어떻게 힘을 동원했고 그가 이룬 상대적인 승리의 내막은 무엇이고 또한 절대적인 승리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나병에 걸려서 별궁에 거하다 죽은 웃시야 왕과 그의 아들 요담 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담 왕의 아들 남 왕국 유다의 12대 아하스 왕에 대해서입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의 죄는 산당 제사를 허용한 것으로서 이야기됩니다만, 아하스 왕의 경우에는 산당 제사를 허용한 것은 물론이고 북 왕국의 왕들이 끌어들였던 베니게 지역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 등을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 왕국과 남 왕국을 통틀어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인신제사를 드리는 몰록을 숭배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아하스 왕은 다윗의 왕통을 이은 인물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우리는 아하스 왕이 이렇게까지 우상숭배에 몰두해서 극한으로 치닫게 된 이유를 파워게임에 참여하는 마음 상태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야기 되던 우상숭배는 기본적으로 모든 신마다 주관하는 특별한 영역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알이나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던 신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우상숭배가 뜻하는 것은 단순히 이방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의미 이전에 이미 마음의 지성소에 풍요와 다산을 받아들였음을 뜻합니다.

마음의 지성소는 궁극적인 행복의 대상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들어온 것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하고 추진하고 노력합니다. 풍요와 다산이 내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자, 그 추구하는 과정으로 바알 숭배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우상 숭배는 이 세상에서 내게 궁극적으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받아들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바로 파워게임에 가담하는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것이 이루어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확정된 상태가 파워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인간 사회가 정해놓은 가치들 중에서 어떤 것을 담게 되면, 파워게임에서 굉장한 승리를 얻을지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승리란 의미가 퇴색한 승리이고 나를 멸망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패배가 되는 일시적인 승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6:33절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라는 구체적 의미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어떤 가치도 나의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필요로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풍요와 다산을 행복의 궁극적인 근거로 믿으면 그것은 곧 이 세상의 풍요와 다산에게 졌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 것 자체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소위 말하는 밀당을 합니다. 이 남자에게 버려지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여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반대로 이 여자가 없으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으면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밉니다.

풍요와 다산에 손을 내미는 이유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패배를 인정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패배가 결정된 상태에서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워게임에서 승리할지라도 그 승리는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인간 세상이 정한 가치를 마음에 들여놓고 이것만이 나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세상의 파워게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아하스 왕의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요단강 동편에 있으므로 늘 적대적 관계에 있던 아람이 함께 동맹을 맺고, 앗수르가 어마어마한 대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대하여 반 앗수르 정책을 펼쳐 나갑니다.

이들은 남 왕국 유다의 12대 왕이었던 아하스 왕에게 반 앗수르 정책의 동맹을 강요하기 위해 남 왕국 유다를 침공하게 됩니다. 이때에 아하스 왕이 이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이 적대하던 앗수르와 화친하여 친 앗수르 정책으로 맞서게 되는데 전형적인 국제적 파워게임이 형성된 것입니다.

북 왕국과 남 왕국은 한 민족이었으나 갈라져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힘을 합쳐서 앗수르에 맞서자 남 왕국 유다는 앗수르와 힘을 합쳐서 대항합니다. 이것이 먹혀들어가서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아람 왕을 죽이고 아람의 수도였던 다메섹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과로 남 왕국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상대적인 승리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서 통일신라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 입장에서는 저희 아버지께서는 이북 분이라 고구려를 중요시하셨고, 어머니는 경상도 분이라 신라를 중요시하셨고, 아내는 전라도라서 백제가 중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들은 삼국이 통일된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락교회에 있을 때에 장로님들은 저를 이북 목사로 분류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경상도에 있는 외가를 자주 다녔습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사는데 정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것이 맞을까요? 정말로 삼국이 통일됐다면 예전에 고구려가 가졌던 만주 땅까지도 가졌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강 이북의 원산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뿐입니다. 그 이후로 만주 땅은 영원히 한민족으로부터 관계없는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상대적 승리입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으르렁대고 지금 남북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것처럼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파워게임의 승리는 후손들에게 그 비옥하고 광활한 만주 땅을 영원히 관계없는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남 왕국 유다가 앗수르에게 손을 내밀어서 북 왕국을 멸한 것은 북 왕국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발판 노릇을 한 것입니다. 물론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자체의 영적 타락이 주원인이었지만, 파워게임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남 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의 친 앗수르 정책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깊숙이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뒤에는 남 왕국 유다에 대해서 기존보다 더 큰 위협과 부담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내가 이기는 바람에 내 인생이 실패하게 되는 상대적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이 당시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맺고 남 왕국 유다에게도 동맹을 강요할 때에,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충심으로 권고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남 왕국 유다를 도우려고 하고 계시기 때문에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군이라고 해봐야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라고 합니다.(7:2~9)

그러나 아하스 왕은 온갖 우상숭배를 통해서 힘을 동원하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굳이 여호와의 힘만을 구해야 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전의 왕들이 했듯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 것을 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렇게 구하는 여호와의 파워는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나타나실 뿐입니다.

다만 여호와의 파워가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서 선민이 갖추어야 될 조건이 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맺고 쳐들어온 상황보다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는 선민이 있을 때에 그 현장에 하나님의 파워는 나타나십니다. 그 선민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눈앞에 펼쳐진 위협적인 현실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적 현실로 느낄 수가 있을까요? 내 마음이 상황에 닿으면 그것이 현실로 체감됩니다. 어떤 상황과 사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현실로 체감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선적인 현실로 체감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전폭적으로 하늘로 보내져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늘로 보내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지 않아야 합니다.

아하스 왕이 이사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나타나시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하나님 뜻이라면 할 수 없다고 여기며 나라에 대해서 죽고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남 왕국 유다가 대대로 산당 제사에 매력을 느껴왔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 앞에서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온 나라의 부강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 중에서 십자가에서 가장 처절하고 수치스러움을 겪으시며 고통 중에 죽으시면서 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무덤에 갇혀계셨을 때에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뒤에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어 계실 때에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셔서 부활과 승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절대 승리의 법칙입니다.

 

회사에서 부장 승진을 앞두고 입사동기들끼리의 파워게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들 윗사람의 힘을 동원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서 승진해야 된다고 믿는다면 이미 진 것이고 궁극적인 패배가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인 승리를 추구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내가 부장으로 올라서는 바람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고, 부장이 되는 바람에 3년 만에 명예퇴직을 강요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과장으로 더 오래 남아서 가정을 안정적으로 부양하는 편이 유익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파워게임의 현장에서 절대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승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파워가 나타나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하나님의 파워가 나타나면서 이끌어져 갈 때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승진에 대해 모든 사람이 굴복하는 상황에서 승진 없이 행복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절대적인 승리 아래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그들을 용서하며 생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이 세상의 가치를 떨쳐버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면, 이 절대적인 승리를 따라 삶의 모든 순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도 파워게임에 대한 경쟁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죽은 자라면 누구와도 파워게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파워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현장에 하나님의 파워가 나타나실 뿐입니다.

그러나 파워게임을 하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파워까지도 동원하려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이미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가치를 담은 것이므로 궁극적인 패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패배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파워를 동원하려는 기도를 하여 이기게 되었다면, 여로보암 2 때의 번영과 같이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마지막 식사일 수 있음을 의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워는 절대로 어떤 기도나 어떤 강청에 의해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전과 십자가에서 죽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그 승리 끝에 하나님의 파워는 자발적으로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성취해나가실 것입니다.

파워게임의 절대적 승리의 원칙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파워게임만으로 채워져 있는 이 세상의 역사와 삶의 현장 속에서, 절대적인 승리의 법칙인 십자가를 붙잡고 오늘 하루도 절대적 승리와 뒤 따르는 하나님의 파워를 경험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