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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경외와 돈 경외, 생명과 중독_태승철

by 태승철 · 16-09-24 09:53 · 7,996

'경외'를 성경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정의하자면 '너무 너무 좋아해서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같아 두려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경외심이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경외는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줄 것이라 믿어져서, 내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생명'에 대한 마음가짐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경외와 돈 경외를 구분하면서 후자를 반(反)생명적 중독(中毒)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와 돈 경외, 생명과 중독

(열왕기하 438~44)

 

 

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경외와 돈 경외, 생명과 중독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경외와 돈 경외, 생명과 중독의 차이

중독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해서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둘째,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이다.

셋째,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버려서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예를 들어 도시의 소음에 중독되어 청각이 마비 상태가 되었다와 같이 사용됩니다.

열왕기하 4장을 경외라는 주제가 관통하는 가운데 중독의 정의 중에 둘째 의미와 연관 지어서 주목해봐야 합니다.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라고 정의했는데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를 병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적이라는 말을 떼어놓고 보면 그것 없이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경외입니다.

사실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를 꼭 병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기 중에 산소가 없어서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을 병적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중독은 정신적 의존성과 함께 신체적 얽매임을 의미하는데, 경외 또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의미에서 경외를 정의하자면 앞서 말한 중독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인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라는 말과 비슷한데, 성경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적용하면 너무너무 좋아해서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전해 주시려는 메시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우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상황이 나옵니다. ‘그 땅은 배경이 되는데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인 특별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고 있는 풍요와 다산이 절대 가치로 추구되고 있었던 땅입니다. 그렇게도 바알 숭배를 통해 풍요와 다산을 추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사가 제자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을 끓이라고 했지만 국거리를 찾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은 들에 나가서 풀을 뜯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독이 든 열매를 따오게 되었고, 그것으로 끓인 국을 먹고 몇 사람이 독성으로 쓰러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루를 넣어서 해독을 시켜 먹을 수 있게 만듭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버리든지 그 풀만 빼고 다시 끓였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해독을 했다고 해도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고생들의 급식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버려야 하는데, 굳이 그 국을 고집하며 먹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실 때에 막16:18절에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연상하는데 그러나 이 사건 자체가 하나의 비유로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적 사건이 있습니다.

한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의 제자들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알고, 마치 옛날에 시골의 가난한 목사님의 집에 몰래 먹을거리를 놓고 가듯이,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떡 한 덩이를 분배를 하자면 한 사람이 하나씩 먹어야 될 떡인데 제자는 백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고 하는데 마치 오병이어처럼 기적이 일어났는데 이 두 사건이 하나님 경외라는 주제와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경외심은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게 치면 경외심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본능입니다.

경외함이 없이 지금 현재 2016923일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으로 내게 만족을 줄 수 있고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입니다.

돈 경외가 일어나는 이유는 돈을 좋아하는 것만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돈 돈 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경외입니다.

또한 돈이 어떤 기능을 담당합니까? 생명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은 나를 살게 하는 힘이고 내가 살아야 될 이유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나 간디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생명에의 외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한 생명은 목숨이 붙어 있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생명은 영적으로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살아야 될 이유를 뜻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만족과 기쁨을 향하여 가게 돼 있습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쁘고 만족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만족하고 기뻐하기 위한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이 경외심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마음가짐이 경외심입니다.

세상에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 생명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생명이 있습니다. 다 이러한 살아야 될 이유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경외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모든 경외와 하나님 경외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자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리였는데 타락 이후에 쫓겨나면서 경외심은 있으나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자리에 경외심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앉혀야만 했는데 사람들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계셔야 되는 그 생명의 자리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대상만이 들어가 설 수 있는 그 자리에, 경외심을 가지고 풍요와 다산의 돈과 부흥이라는 가치를 그 자리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외가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오늘 본문이 그 차이점을 구분 짓고 있는데 이것은 경외가 아닌 중독이라고 하십니다.

중독(中毒)이란 가운데 자와 독 자를 쓰는데 독 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독에 의해서 장악된 것이고 독은 반생명적인 요소입니다.

생명현상은 기쁨이고 만족이고 감사이고, 반생명적현상은 걱정 근심 우울함 슬픔 화 원망 시기인데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독 안에 머물고 있는 중독현상입니다.

자녀를 잘 키워서 보람을 느끼려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의 자리에 자녀를 앉힌 것이고, 그 자체가 독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것들은 다 독으로 변하게 됨을 본문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외가 중독이 되는 이유는 독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들판에서 따온 이상한 열매를 국에 넣었습니다. 내 마음이 솥인데 자녀를 집어넣으면 자녀가 생명입니다. 자녀로 기쁘고 만족하기를 원하면 자녀가 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마음이 경외와 닮은 중독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생명현상이 나타나고 자녀를 경외하면 중독이라는 반생명적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나 돈에 대한 태도는 똑같은 경외인데,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생명현상으로서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과 행복과 감사로 나타납니다. 똑같이 경외를 하더라도 돈에 대한 경외를 하면 반생명적현상으로서 걱정 근심 우울 분노 시기 등이 나타나는데 경외가 아닌 중독입니다. 왜냐하면 반생명적현상을 결과하게 하는 경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넣은 가루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상번제를 드릴 때에 어린양과 함께 곡식을 빻아서 고운가루를 소제로 드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엘리사도 아마 조금 남았던 밀가루 같은 것을 뿌렸을 것입니다. 이 가루는 번제를 드릴 때 함께 드리는 소제의 의미로부터 유추하면 내 마음이 이 땅의 삶에서 가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생명의 자리에 담았으면 나는 중독의 상태인데, 가루가 되는 것은 이 상태가 부서져 나감을 뜻합니다. 마음에 돈이 들어온 상태가 부서져 나가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수넴 여인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고 해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통해 우리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매 순간 예수님을 기억하며 사도 바울의 말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날마다 죽고 순간마다 죽다보면,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밀가루가 덩어리로 뭉치듯이 뭉쳐질 기회가 존재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시간이 쪼개져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마음에 돈이나 자녀나 명예나 권력 등이 생명자리에 들어올지라도 이 세상에 대한 일들이 우리 마음에 덩어리로 남아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번제로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하고 예수님 다시 살리기를 하다보면 우리 마음은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 가루가 되고 십자가에서 내가 포개지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과 포개어 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나의 마음을 승천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반복적으로 살 때에 내 삶의 시간과 마음은 세상에 대해서 가루가 되어 어떤 것도 담을 수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마음에 집어넣으면 자녀의 일들에 관한 생각의 덩어리가 커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포개어질 때에 자녀에 대해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므로 내 삶의 모든 시간과 생각은 쪼개져서 가루가 되는데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중독을 해독시키는 가루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여 삶이 가루가 되면, 어떤 생명을 하나님의 자리에 넣으려 할지라도 그것들은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다 해독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들이 해독되면 걱정 근심 우울 불만 시기 원망과 같은 반생명적현상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해독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두 번째 기적을 통해 제시됩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포개지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과 포개짐으로서 예수님 살리기를 생활화 할 때에 부활 승천의 역사적 사건이 우리의 삶에서 매 순간 반복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마음이 가루가 된 상태에서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결실이 생기게 될까요?

사람은 백 명인데 보리떡 스무 개와 채소 한 자루 밖에 없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한 제자들이니 한 사람이 세 덩어리는 먹어야 될 것이나 게하시의 눈에는 너무나 부족해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세상에 대한 마음의 관심이 가루가 되어버려 해독된 경외의 삶이 부족하게만 보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살 수 있나?’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에도 이래서야 라는 인간이 이 지구위에 태어났다가 죽고 돌아갔을 때 무슨 결실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결실이 넘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대로 마음의 생명자리에 돈을 채우고 돈을 경외하면서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면 결실이 많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재벌이든 세계 10대 부자이든 죽으면 한 줌 흙 밖에 남지 않습니다. 잡으면 다 새나가는 허무 밖에 남지 않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