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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승리 후유증을 없애는 V 라인_태승철

by 태승철 · 16-08-27 10:42 · 7,937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패배는 승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룬 승리에 합당한 뒤처리가 없기 때문에 주어집니다. 승리 후유증의 부정적인 힘이 승리의 긍정적 효과보다 큰 경우 우리의 삶은 승리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십자가 생활화가 올바르게 정착 된 선민에게 있어서 승리보다 일상적이고 흔한 일은 없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은 주어진 승리의 뒤처리입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그 뒤처리는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지요.

승리 후유증을 없애는 V라인

(열왕기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오늘 읽은 말씀으로 <승리 후유증을 없애는 V 라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승리 후유증을 없애는 V라인

후유증은 위중한 병이나 교통사고 등 심각한 불행한 일을 겪은 후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바닷가에 나가서 소나무 길을 산책하다보면 후유증을 안고 열심히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중풍에 걸렸다가 몸이 거동할 만큼 회복되어서 한쪽 다리를 절며 걸으시는 분도 있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날씨가 흐리고 비만 오면 온 관절이 쑤시고 아프다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애인에게 버림받은 후유증으로 또 다시 버림받을까 염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주로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후유증이 일어납니다만, 실제로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후유증은 승리의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좀 더 범위를 확대해서 말하자면 성공의 후유증이고 건강의 후유증입니다. 얼핏 건강의 후유증이라는 표현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건강했기 때문에 모든 불행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픈 동안에는 아픔 자체가 불행할 뿐이지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건강하지 않았으면 안 갔고 안 했을 생각들을 건강하여 감행하는 바람에 인생이 비뚤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대입에 실패한 후유증만을 생각합니다만 일류대학에 합격한 승리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후유증은 일어납니다.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마음이 교만해지는 바람에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선민의 경우에는 승리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승리의 뒤처리입니다. 우리는 승리해 보겠다고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마는 선민의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내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면 승리는 삶의 내용이고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승리를 할 능력이 없거나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지는 승리의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뒤처리 능력이 없고 승리의 후유증을 없애는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의미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끌려가려는 순간마다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지 도중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느끼지 못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음의 기도를 하면 마음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올라가면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몸과 생각을 장갑 삼으시고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모든 뜻이 승리입니다.

작은 승리도 있고 큰 승리도 있겠지만 그 크기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나에게 밥 한 수저를 떠먹게 허락하신 것이나 지구를 없애는 일이나 어려움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만원을 버는 것보다 백억을 버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의 의미가 없고 무조건 삶 전체가 승리의 삶이 되는데 여기에서 V라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승리는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의 삶에 다반사로 지천에 깔려야 합니다. 승리 한 번 해보겠다고 바동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승리가 발에 차이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진짜 선민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천으로 주시는 승리의 후유증을 제거하는 V라인을 그려가야 하는데 이 V라인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서 갈멜산에 위대하고 장쾌한 승리의 이야기가 나왔고 마지막 45~46절에는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라고 합니다.

갈멜에서 이스르엘 평야를 가로질러서 이스라엘 성읍에 도달하기 위한 거리는 22.4km정도가 됩니다. 마라톤의 절반 길이 정도인데 그 길을 아합 왕의 마차가 달리는데, 엘리야가 그보다 빠르게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달려갔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앞으로 아합 왕이 마차를 타고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것과 앞으로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표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매 달렸다라고 하는데 이 여호와의 능력은 히브리어의 본뜻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승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엘리야가 이룬 승리이고, 아합 왕의 마차보다 빠르게 달려간 것도 여호와의 손이 임해서 달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풍당당했던 엘리야가 갑자기 대반전을 맞이하여 고꾸라지는데 이게 희한하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위협을 사신을 통해 듣고는 심신의 탈진상태가 일어나고 마는데, 방금 전까지 담대하고 영적인 호기가 넘치던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180도로 달라질 수 있을까요?

주석들을 보니 이 상황을 단순히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가변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 말씀의 취지를 심하게 간과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세벨이 위협을 가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두렵기로 말하면 갈멜산 위에서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3년 동안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에 아합 왕과 이세벨은 지속적으로 엘리야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멜산에서 아합 왕은 자신의 호위무사들을 비롯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함께 있고 엘리야는 혼자서 대결을 벌여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상황을 더 무서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아합 왕의 마차보다도 더 빠르게 달려놓고 이세벨의 말에 좌절감과 허탈함에 짓눌려 탈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내막이 있습니다.

 

이세벨은 북 왕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찌들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마음속에는 갈멜산의 승리를 이세벨도 보았어야만 했다는 아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아합 왕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서 이세벨에게 거품을 물고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야는 이세벨의 반응을 예상하고 추측했는데 예상과 기대가 달라지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탈진한 도피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아합 왕에게서 갈멜산에서 있었던 대결의 이야기를 듣고 제 아무리 악한 이세벨일지라도 기손 시냇가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절할 듯이 놀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고, 이제는 그 기세가 꺾여서 그동안의 바알 숭배가 헛되었음을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여호와를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러한 추측을 했으리라고 알 수 있는 이유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합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엘리야의 마음속에 자기가 조상들보다 낫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긋날 때마다 참된 믿음의 선지자들과 선배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돌리려고 했지만 지금에 이르렀고 오히려 바알 숭배가 더 편만해졌습니다. 즉 훌륭한 조상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리는 것에 실패했지만, 그러나 엘리야 자신은 갈멜산에서의 승리로 아합 왕과 아합 왕의 얘기를 들은 이세벨이 고꾸라지면 훌륭한 조상들도 못했던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 죽이고야 말겠다는 위협을 듣자 오히려 자신이 고꾸라지고 맙니다.

갈멜산에서나 마차 앞에서 뛸 때처럼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 있었다면 고꾸라지지 않았을 것인데, 자기 예상과 달리 이세벨의 죽이고야 말겠다는 위협에 이세벨의 장갑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세벨로 인한 두려움이 엘리야를 장갑삼아 끼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된 이유는 V라인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장갑 삼으실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가 마음을 다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이유는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장갑으로 끼셨고 드디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영어의 V자를 생각해보세요. 왼쪽 위에서부터 아래로 선이 그어져갑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에서 그려지는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장갑 삼으셔서 V자의 모양처럼 뾰족한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승리가 쟁취되는 곳입니다.

그러고 나면 엘리야의 마음은 다시 V자의 오른쪽 선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어야만 했는데, 갈멜산의 승리에 마음이 묶이자 그 승리위에서서 이세벨의 반응을 예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에 이세벨이 위협을 하자 그것이 두려움으로 변하여 엘리야를 장악했던 것입니다.

승리는 엘리야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후유증을 제거하는 것인데 뒤처리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뒤처리를 위해서는 승리에서 마음이 떠났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빌3:13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십니다.

많은 일을 했고 가는 곳마다 승리가 일어났는데 그 승리는 다 뒤로 하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이 푯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들입니다. 이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이유와 달려갈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지만 내가 받을 상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며 만족할 상은 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끊임없이 위로 보낸다는 것이고 기쁨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장갑 삼으셔서 이 땅에서 V자 뾰족한 부분에서 승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럴 때에 사도 바울은 그 승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보냈는데 V자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고 전형적으로 나타내주시는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송하셨던 칠십 인의 제자가 돌아와서 보고를 할 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0:17절에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하는데 이 땅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1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파송한 제자들을 장갑삼아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말로만 듣던 귀신들이 내가 예수 이름으로 말하기만 하면 물러가는 승리를 쟁취하고 있는데 그 승리를 기뻐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장갑삼아서 이루는 승리를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증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승리를 주셨다며 말하고 듣는 사람들도 아멘! 할렐루야! 외치며 박수치고 난리가 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주어진 이 땅에서의 승리로 인해 기뻐하지 말고 대신에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시는데 우리 이름이 하늘에 어떻게 기록이 됩니까?

우리 마음을 다 하늘에 드릴 때 받아들여지는 것을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십니다. 기쁨은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 삼으셔서 이루신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