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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 승리가 효과 없는 이유_태승철

작성일
16-08-26 10:27
작성자
태승철
조회
7,916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및 아세라 선지자들과 겨루어 이룬 승리는 단연코 성경에서 기억 되는 위대하고 통쾌한 승리들 중의 으뜸입니다. 그런데 이런 승리에 뒤 따르는 상황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이 위대한 승리로 인한 효과가 너무 미비하다는 점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북왕국에 여호와 신앙의 부흥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아합과 이세벨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엘리야조차 이세벨의 협박을 피해 도망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갈멜산 승리가 효과 없는 이유

(열왕기상 18:16~46)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갈멜산 승리가 효과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갈멜산 승리가 효과 없는 이유

성경에서 소개된 선민이 치룬 전쟁 중에는 통쾌하고 위대한 전쟁이 많았는데,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가능했던 승리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장 뚜렷하고 명확하게 기억하는 대결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멜산의 대결일 것인데, 성경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토록 통쾌하고 위대한 승리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열두 통의 물을 핥았습니다. 반면에 바알 선지자 450명은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바알을 부르며 미친 듯이 발광을 했지만 제단은 싸늘했는데, 이 장면을 보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더 보면 이러한 승리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잡아 죽였는데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라가 국권을 동원해서 바알 숭배를 강요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상황에서 정말로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잡아 죽인 북 왕국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압도하는 여호와 신앙의 부흥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그 현장을 목도한 아합이나 이 말을 전해들은 바알 숭배를 했던 사람들이나 이세벨이 통회자복하고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섰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제단에 불이 내렸기 때문에, 누가 봐도 확연하게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참 신으로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이 승리에 대한 전리품이 보이질 않습니다.

웬만하면 그런 대결의 승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엘리야가 대선지자이고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고백을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이세벨은 기세가 더욱 등등해져서 승리의 주역인 엘리야 선지자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공언을 하기까지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회개 없이 지속적으로 여로보암의 길을 걸으며 바알 숭배를 하다가 결국 예언대로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기세등등한 협박을 전해들은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위풍당당한 승리의 모습은 간데없고 죽을까 겁을 내며 호렙산으로 줄행랑을 치는데 이럴 바에는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여호와가 참 하나님으로 드러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알 숭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더 모욕적인 것만 같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일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바알 숭배를 계속해 나가는데 정말 충격적이고 모욕적입니다.

 

어릴 적에 본 영화의 장면이 기억납니다. 적국의 거대한 댐을 폭파시키는 작전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게 됩니다. 그런데 불과 연기가 다 사라지자 댐이 여전히 건재하므로 다 실패한 줄 알고 특공대가 낙심하고 있을 때에 댐에 서서히 균열이 가면서 완전히 파괴됩니다.

오늘 본문의 바알 숭배의 댐은 핵폭탄 같은 갈멜산의 대결을 통한 엘리야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코 흠집조차 나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대단하고 위대한 승리가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바알 숭배를 하던 이스라엘 선민들이 하루아침에 여호와 신앙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합은 눈앞에서 그 일을 봤지만 절대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짐을 보고 바위에서 물이 터지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 오래 가지 못했던 그 옛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불치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어도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가고 배반하여 저주까지 할 정도였는데 모든 이적과 기사의 효과는 일종의 일시적인 충격요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결의 현장에서 기적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임을 알고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였어도 회개하지 않은 이유는 뿌리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인데, 엘리야의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아주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했으나, 이스라엘의 태도는 엘리야의 질문의 기세에 걸맞게 분명하고 단호하지 않았는데, 이 질문의 대답이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바알 숭배에 빠졌더라도 엘리야가 확신에 차서 혈혈단신으로 나서는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은 있을법한데, 희한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모습에서 이들이 아직도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때도 똑같은 질문을 백성들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24:15~16절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대답하는데 오늘 엘리야의 촉구를 담은 질문과 이것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촉구가 표면적인 것처럼,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알아듣지 못할 말이 아니었는데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 간에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말 두필이 끄는 마차를 이두마차라고 합니다. 이두마차 위에 올라탄 사람에게 두 마리 말 중에서 한 마리만 선택하지 왜 두 마리 말 중에서 머뭇거리고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는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생각할 때에 신의 자리인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 마음의 지성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영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신의 자리인 우리 마음에 어떤 것을 들여놓으면 그 대상을 신처럼 대우하게 되고 그것이 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의 자리에 모셔 들여진 마음에 대해서 행하는 핵심적 본질은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가 아니라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의 근거로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백성들은 지금 각자가 마음의 첫 번째 자리인 마음의 지성소이고 신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나 바알을 들여놓은 상태가 아니라 그 신의 자리에 풍요와 다산을 들여놓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어야 만족하고 기쁘고, 내가 하는 일에 부흥이 일어나야 참 기쁨이 주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숭배를 경계하고 비난하면서 여호와냐 바알이냐의 결단을 촉구한 내용의 깊이를 들여다보자면 여호와 하나님이냐 풍요와 다산이냐를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예를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주신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독자 이삭 중에서 신의 자리인 마음에 들어올 대상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한 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른 한 쪽에는 풍요와 다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풍요와 다산을 신의 자리인 마음에 들여놓은 상태였으므로 이 상태를 반성하지 않고 붙박이로 전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신이 여호와든 바알이든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풍요와 다산을 위하여 여호와와 바알이 이끄는 이두마차를 타고 가면 더욱 더 좋을 뿐입니다. 거기에 더해 아세라나 몰록 신을 믿으면 더 좋겠다고 다다익선으로 생각합니다.

신의 자리인 마음에 풍요와 다산을 담고 있는 상태에서 엘리야가 이룬 승리를 보고 여호와가 참 신이라고 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것도, 풍요와 다산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알은 소용이 없다고 인정한 것일 뿐입니다.

바알 선지자를 죽인 뒤에도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바알 숭배가 만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풍요와 다산을 소원하는 열정적 마음상태에서는 객관적으로 바알이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나의 주관적인 소원과 열정의 표출 방식에 불과한 것이기에 바알 숭배가 얼마든지 이스라엘에서 팽배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의 대결을 보고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의문을 갖지만, 이런 마음의 상태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자리인 마음에 자녀나 사업이나 부흥을 들여놓았다면 바알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든지 죽으셨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알 숭배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고 해서 여호와 신앙이 발흥하지 않는 것은, 지금 지구에서 다른 모든 종교가 없어지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만 남더라도 참된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의 자리인 마음에 세상을 담은 사람들로 인하여 새로운 종교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신들이 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믿으면서 살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려면 반드시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유일한 만족과 기쁨의 이유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점이 안 되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믿음의 뿌리도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평생 하나님을 믿어도 갈멜산의 승리를 보고도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선민의 신앙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급박한 돈 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부부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만을 유일한 만족과 기쁨으로 믿는 신앙인은 이러한 문제의 상황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마음에 평강이 깨지는 것은 하나님이 없어서 깨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자식이 문제라서 부부가 문제라서가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은 우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의 삶에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그 문제의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내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온전히 만족하고 기쁠 수 있기 위해 매달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 문제가 있지만 나는 하나님 때문에 기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 마음에 오셔서 평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자꾸 이 세상 것들에 붙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 위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기도는 싸움이고 전쟁입니다.

돈이 없고, 남이 나를 욕하고, 자녀의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 이유는 유전 죄로 인한 체질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죄악의 뿌리입니다. 자꾸만 이 세상의 것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고, 이 세상 상황이 변하면 따라서 마음의 평강이 깨지는 것은 유전 죄 때문인데 이것을 붙박이로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이유는 돈이 신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전제하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갈멜산 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내 마음은 유전적 체질로 인해서 이 세상에 끌려가며 그것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 상황이 바뀜에 따라 불안하고 걱정하고 평강이 유리병처럼 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으면서 세상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급하고 불안하고 걱정한다면 속고 있는 것임을 알고 십자가에서 죽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 고전15: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의 이유인 것을 믿고, 세상에 끌려가고 신의 자리인 마음에 세상 것이 들여오려는 것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올라가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서 하나님께서 반응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만으로 기쁘고 만족하겠다는 고백의 기도가 없이 뜻을 구한다면 어느덧 신의 자리에 들여놓은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닙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돈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치료 받지 못하고 죽든지, 병원으로 가게 하시든지, 기적적으로 치료하시든지, 사도바울처럼 계속 병을 놔두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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