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기_태승철

작성일
16-08-23 08:38
작성자
태승철
조회
7,379

아니,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기'라니? 아예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 하고 항변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음에는 아주 분명한 증거가 따름니다. 이 증거를 거울 삼아서 내 믿음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진단해내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기

(열왕기상 17:1-7)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기

이 제목을 듣자마자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마음에 약간의 불편함과 저항감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 것이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실 텐데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나 자신의 주관적인 열망의 표현이고 소망의 표현입니다.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고백이고 갖고 싶은 것을 향한 열망과 소망의 표현으로 주관적인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나 자신의 주관적인 필요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신을 거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신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죽은 우상에게 절을 하고 기도하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에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불상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살아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상숭배와 모든 종교 행위가 주관적인 나 자신의 열망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맹점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도 우상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는데 어느 집 대문이 열리면서 사나운 개가 짖으면서 뛰어 나오면 많은 분들이 엄마야!’라고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 때에 엄마는 객관적으로 자기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기 마음의 다급함과 놀람을 표현한 방식인데 우상숭배가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객관적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열망의 표현방식으로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운운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종교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주관적인 열망의 표현방식으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고 반드시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그 증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 본문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 본문을 통해서 그 증거를 말해보자면 지금 3년 반 동안 진행되는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를 시켜서 떡과 고기를 아침저녁으로 날라다 먹이도록 하셨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증거를 알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3년 반의 가뭄이 시작되는 가운데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말하듯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확대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얼마를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더 확대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풍요와 다산을 추구함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죽은 사람처럼 세상일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까마귀를 시켜서 엘리야를 먹이시듯이 내 삶에서 일어나야 될 이 땅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신실하심을 믿으면, 나는 이 땅에 대해서 완전히 죽는 것이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가 됩니다. 이 땅에 대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말씀하십니다.

 

대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앞장에서 언급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였습니다.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의 선동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절정에 이르게 되고, 이런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극심한 가뭄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민 이스라엘에게 이 바알신이 유행처럼 번져서 신앙의 한 형태가 되었는데 소위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비와 바람과 구름과 햇빛을 관장하는 농사의 신, 바알 숭배가 절정에 달한 시점에 3년 반이라는 어마 무시한 기간 동안 가뭄이 닥칩니다.

1절에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너희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바알을 숭배하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선민 나라에 염병처럼 번져가는 바알 숭배에 대비시켜서 가뭄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극심한 가뭄 속에서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고기와 떡을 물어다 먹이는데, 이 가뭄 속에서 까마귀도 자기의 먹거리가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까마귀가 음식을 먹지 않고 엘리야에게 가져다 준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기적입니다. 또한 까마귀는 레위기 11장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언급이 되었는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의 역사를 이 부정한 짐승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부정과 정함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 옛날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직접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셨으니, 그릿 시냇가에 숨길 필요 없이 엘리야가 머물고 있는 마당에서 샘이 솟게 하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떡 대신 만나를 주셨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상징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이 있는데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게 하고 현재 임하고 있는 가뭄과 홍수를 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두 가지 홍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비를 내리셨던 물의 홍수였고, 다른 한 가지는 영적으로 인간의 악함의 홍수였습니다.

까마귀를 통해서 연상시키시려고 하셨던 것은 선민의 나라인 북 왕국 이스라엘에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 세상의 삶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열정의 홍수가 지면을 덮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참 재미있고 특이합니다. 바로 앞에서 아합 왕의 바알 숭배와 연관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삶이 정면으로 대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면 스스로 풍요와 다산을 추구할 수가 없고, 내 삶의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믿지 않는 바알 숭배가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앞장에서 난데없이 아합 왕 때에 바알 숭배가 성행한 것과 앞장 마지막 34절에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라고 하시고, 여호수아 626절에 여리고성이 함락 된 뒤에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벧엘 사람 히엘의 맏아들과 막내아들이 죽었습니다. 아합 왕 때에 있었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제쳐두고 갑자기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고 여리고 성의 재건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거를 확실하게 밝히시기 위함입니다. 여리고 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가 이 시대에는 사라졌기 때문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로 가뭄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매일 한 번씩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때에 함성을 지르면서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여리고 성 함락은 가나안에서 벌어질 모든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첫 번째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전쟁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에서의 모습이 우리가 삶에 대해서 취해야 할 전형적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이스라엘의 대열은 제사장이 법궤를 짊어지고 일곱 제사장이 법궤 앞에서 일곱 양각나팔을 불며 걸어갑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을 든 제사장들 앞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고, 법궤 뒤로는 후군이 대열을 갖추어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싸워야 될 적군들이 모여 있는 적진이었습니다. 적진을 돌 때에 일곱 나팔의 소리가 크게 들리므로 모든 대열이 이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곳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 안에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이 인격체로 살아계시며 말씀하시는 증거인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말씀하신다는 것은 생각이 있으시고 계획하시고 의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적진에서조차도 선민의 마음은 적을 바라보면서 적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법궤를 바라보면서 법궤가 가리키는 하늘의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마음으로 법궤만을 바라보면서 법궤 속의 돌판이 가리키는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생각하시며 계획하시며 의도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여리고성이 함락되었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직장에 보내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여리고성에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여리고성을 바라보면서 우리 힘으로 공략하기 위해 계획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나가서 싸워서 이기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승진하려고 그 열망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서 종교를 채택하는 것입니다.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온 것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뭄이 들어서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는데 떡과 고기를 물어 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은 것보다도 더 큰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이 오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먹고 마시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켜야만 하는 것과 같은 우리 삶의 모든 과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순간 우리의 책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야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이 세상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 순간만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이며 믿음이 정지 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눈앞에 둔 과제를 아시고 의도하시며 계획하시는 것을 믿으면 내 생각과 계획이 미칠 수가 없고 내 소원이 나타날 수가 없는데 여리고성을 돌 때에 단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법궤 안의 말씀의 돌판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입의 침묵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침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므로 여리고 성의 대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민을 여리고 성으로 보내신 이유는 여리고성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었지 성을 함락시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가정을 주신 이유는 가정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다스려 주신다는 것이지 가정을 잘 이끌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주신 것도 자녀를 잘 기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한 것처럼 자녀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면, 자녀라는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에 부흥을 꾀하는 것입니다. 까마귀가 상징하므로 상기시키는 것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내 삶을 잘 만들고 성공하며 부자 되고 부흥하겠다는 소망과 열정으로 홍수를 이루는데 엘리야 때 아합 왕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살아계심의 불신이 홍수를 이루고 있음을 뜻합니다. 세상에 대한 열정과 소망과 비전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불신은 커져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무관하게 혼자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내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아계십니다. 법궤 안의 돌판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하여 살아계시고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의도하십니다.

 

우리는 원죄에 지배되는 인격의 본질 상 진노의 자식이기에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획하고 소망합니다. 그것이 바알 숭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죽은 우상이라야 나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내가 계획하고 소원하며 이 세상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한 하나님을 우상시하고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가뭄 속에서도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먹여주셨듯이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기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소원하고 열정이 생기려고 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내가 죽었습니다.’라고 5초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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