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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내 이익을 내가 추구하는 저주_태승철

by 태승철 · 16-06-29 07:26 · 7,780

이익을 남기는 절대 장사법!? 이에 대한 목마름은 하늘을 찌릅니다만, 과연 이런 것이 있을까요?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지금 660만 자영업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00만명중에 80만명이 3년 내에 폐업한답니다. 대체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장사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삶의 법을 몰라서 입니다. 다름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저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장사를 포함해서 삶 자체는 이익추구 대신에 주신대로만 사는 거지요.

내 이익을 내가 추구하는 저주

(열왕기상 2:1~46)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내 이익을 내가 추구하는 저주>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내 이익을 내가 추구하는 저주

미국과 캐나다에 있을 때에 많이 보기도 했고 들어도 보았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3,000~3,500불정도 벌고, 부인이 1,500~2,000불 정도를 벌고 합쳐서 5,000~6,000불 정도를 버는 월급쟁이 맞벌이 가정이 있었습니다. 대출을 받고 조금씩 저금한 것을 합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안고 신바람이 나서 밤낮없이 한 달 내내 뛰었지만 종업원들 월급주고 나면 첫 달에 1,000불도 가져가기가 힘들었고, 일 년이 지나도록 잠도 제대로 못자고 먹지도 못하면서 3,000불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경비와 세금을 제외하면 한 달에 종업원이 가져가는 돈 보다도 이들 부부가 가져가는 인건비가 더 적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명견만리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660만 자영업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660만 자영업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영업자 한 사람당 부양하는 가족의 수를 생각하면 족히 2,000만 명은 됩니다. 즉 인구의 절반이 조금 못 되는 막대한 숫자가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리는데, 자영업자의 90%는 대출을 받아 시작을 하고 100만 명 중에 80만 명은 3년 안에 폐업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장님은 월급쟁이 시절의 두 배의 수입을 꿈꾸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를 가장 이상적인 자영업 성공적 수치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최소한 월급의 두 배 정도는 되어야 모험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업을 하고 1년이 지나서야 겨우 흑자를 보고 지금까지 회계를 해보았더니,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을 그만두게 했는데 딱 그 만큼이 남았더라고 하는데 정말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660만 명의 자영업자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성경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익이 남는 절대 장사 법이 아닌 행복이 남는 절대 장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삶을 근원적으로 보기 위하여 에덴으로부터 살펴봅니다. 에덴은 우리의 삶을 위해 새로운 것을 갖추어야 될 필요가 없는 곳인데, 잃어버린 에덴의 모습을 굳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 자영업의 시대와 직결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에덴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실린 이유는, 원초적으로 주시는 대로 받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만큼 받고 살면 누구의 삶이나 에덴이 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쁘고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에덴동산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에덴은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준비하신 삶의 터전으로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낙원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인간은 자기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70억 인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저주의 첫 번째 증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영업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익을 남기는 장사를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저주받은 형태의 삶을 고집하면서 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가난을 저주로 강조하셨는데 그러나 가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가짐과 삶이 저주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지금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나를 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입장을 옹호하고 내 입장을 변호하고 내 입장을 세우려고 하며 내 입장을 유익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불행해합니다.

원래 사람은 100% 은혜로만 살게 되었습니다. 내 노력이 99%고 나머지 1%가 은혜라든지, 반대로 1%가 노력이고 은혜가 99%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100%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야만 하느냐? 아닙니다. 에덴에서 타락하기 이전에도 추구는 있었습니다. 추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창조적 본성으로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이 땅에서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저주 받은 것인데, 우리는 왜 바보 같이 내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일까요? 이 말이 굉장히 어색할 정도로 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추구는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본성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만족과 기쁨이 있을 때까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만족하느냐는 것인데 이것이 사랑이나 진리나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익을 추구함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유명한 다윗이 죽게 됩니다.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첫 번째로는 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을 지키라는 요청과 명령을 대할 때마다 문자에 몸을 맞추는 행위의 원칙으로 보기 전에 먼저 증거물로 봐야만 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증거물로 보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라고 하시는데 형통의 비결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인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다윗이 고난의 시절부터 왕으로 있을 때에 함께 했던 요압 장군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바르실래는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으로 피난을 갈 때 여러 가지로 공궤했으므로 그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라고 합니다. 또한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피난 갈 때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악독한 말로 저주할 때 아비새가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보고 말렸는데 새삼스럽게 죗값을 치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넷째 아들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시키게 하고, 아도니야도 다윗 왕의 첩이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함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비록 아비삭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어도 엄연히 다윗의 첩으로 공인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 정치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22:5절에서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할 때에 다윗이 솔로몬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는지가 나타납니다.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라고 합니다. 이처럼 솔로몬을 어리고 미숙한 자로 보고 있으면서 왜 요압과 시므이 같은 정적들을 처리할 것을 유언하고, 부담스러운 짐을 넘겨주는지 쉽게 이해되질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다른 충성된 신하들에게 명령하여서 요압을 죽이는 것은 문제도 안 되고, 그까짓 시므이 정리하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이 정적들을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굳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겨서 처리하게 하는데 놀라운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솔로몬의 왕권을 견고하게 확립하는 과정에서 숙청이 일어나게 됐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자면 의미가 다른데 다윗이 죽는 순간에 그의 생애 전체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요압 장군은 다윗 왕의 말을 들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다가 선왕의 첩을 취했다는 이스보셋의 꾸지람에 이스라엘 열 지파를 데리고 다윗에게 와서 평화조약을 맺으려하자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또한 압살롬의 모반 사건 때에도 앞장섰던 아마사를 등용해서 평화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자 요압이 그도 죽였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죽였을 때 친위대나 근위대를 통해서 요압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 나서질 않았습니다.

 

이후 숙청을 통해서 솔로몬이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의 생애입니다. 다윗은 생애 동안에 자기 수하의 장군 하나를 죽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장군은 고사하고 아비새 장군의 말에 의하면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라고 하였던 시므이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위한 이익을 위해 나서는 것을 절대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다윗의 삶에서 단 한 번 구멍이 났는데 밧세바를 마음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방해가 되는 우리아를 제거했는데, 다윗에게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사건을 우리는 일생동안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서 다윗의 생애가 얼마나 큰 혼란과 재난으로 빠졌는가를 앞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철이 든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이 밧세바-우리아 패턴의 죄악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밧세바를 범하지도 않았고 우리아를 죽이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똑같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나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은 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건 안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추구하는 능력과 성향을 주신 것일까요? 하늘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앞서 하늘을 추구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모세가 기록한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데 이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열심이 부족한 것으로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의 모반 사건이나 아마사가 배반하므로 나라에 환난이 있을 때에나 나라가 안정 가운데 있다고 해서 평강한 것도 행복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윗의 행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돈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내 마음의 행복과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으로 행복하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율법대로 살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할 때에 이 세상은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가장 무서운 저주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간구하거나 기도하거나 애원하지 않았을 때에 인간을 위한 삶의 터전을 만드셨는데 기쁨의 동산 에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이익을 챙기지 않을 때에 에덴이 주어지는데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게으른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이 땅에서는 절대로 내 이익을 챙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지속되는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자영업을 하게 되면 그 현장이 에덴이 됩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책을 읽어도 읽는 그 순간에만 희망에 부풀어 기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기적일 것인데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EU에서 탈퇴하자마자 제일먼저 경제부터 걱정을 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경제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합치면 완전히 해결될까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깁니다. 아마 그 상을 받은 당사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의 논문이 엉터리였음을 자각하며 창피해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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