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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자족은 확장과 성장의 무덤 아닐까?_태승철

by 태승철 · 16-05-28 12:10 · 9,557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나니"(빌4:11) 그런데 자족(自足)하는 자에게 확장과 성장과 발전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족을 기리는 반면 불평과 원망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확장이나 발전 등이 지금의 형편에 대한 불만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대체 어디서 그 동인과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자족은 확장욕구의 반대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족하여 확장욕구가 죽은 다윗, 이상하게 그에게 엄청난 실제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자족은 확장과 성장의 무덤 아닐까?

(사무엘하 8:1~18)

 

 

1.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2.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

3.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4.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5.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7.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8. 또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자족은 확장과 성장의 무덤 아닐까?>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자족은 확장과 성장의 무덤 아닐까?’

자족하는 사람에게 발전이나 확장이나 성장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자족의 반대를 불평과 원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족의 마음가짐을 기리고 불평과 원망의 마음가짐을 경계합니다. 자족해서 지금이 만족하다면 확장을 욕망하지도 않고 성장을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족은 발전과 확장과 성장 욕구의 무덤입니다. 결국 발전 욕구, 성장 욕구, 확장 욕구를 갖는 것은 불평의 다른 한 형식인 것입니다. 단순히 제자리에 앉아서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불평을 하려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극복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려는 창의적인 불평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평과 원망을 했는데 이러한 불평과 원망은 오늘날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를 만들어내고 사막을 오렌지들판으로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막의 상태에서 자족했다면 변화와 발전과 확장과 성장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원망과 불평은 성장욕구 확장욕구로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이 되므로 불평이 있고 불만이 있어야 합니다. 확장 욕구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불평으로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족은 스스로 만족함을 느끼는 것으로 분명히 확장 욕구의 무덤입니다. 내 마음 안에서 자족하고 있다면 성장하고 확장하고 발전해야겠다는 욕구가 생길 수가 없는데 그 두 가지 마음은 동시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신앙적 측면에서의 자족은 확장 욕구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을까요?

 

복음 안에서의 자족도 확장 욕구가 내 안에 생길 수 없으므로 무덤인 것은 같습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발전욕구 성장욕구 확장욕구의 무덤입니다. 4:11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씀이 있지만 이 말씀이 참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비천을 극복하고 비천한 상태를 발전적으로 변화시켜서 성장해 나가야지 왜 비천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자족은 스스로 만족함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이 상태로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다는 의식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족은 의식의 작용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한 것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한다.’는 것이 다른데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도착하는 길이시며 그 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한다.’는 것은 그 길의 종착지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와 세상의 자족이 다른 점은 자족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셔 들임이 있다는 것이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발전과 성장과 확장의 욕구를 가지고 계신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신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을 만나 마음을 채우고 이 세상의 형편이 어떻든지 자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 분이고 하늘에 계신 분으로 만족하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는 자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오셨을 때에 내가 사는 이 땅에 대해서 성장 욕구와 확장 욕구와 발전 욕구를 그 뜻과 섭리의 실현으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족은 확장과 성장과 발전 욕구의 무덤일 뿐 아니라 실제로 성장과 확장과 발전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자족은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심으로부터 이 땅에 대해서 갖고 계신 당신의 뜻이 펼쳐질 때 거기에 성장과 발전과 확장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의 자족은 분명히 성장 욕구와 확장 욕구와 발전 욕구의 무덤인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자족이 내 마음속에서 성장 욕구와 발전 욕구와 확장 욕구의 무덤인 동시에 실제 발전과 성장과 확장의 산실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가 자족하면 발전과 성장과 확장에 대한 욕구가 하나도 없는데 이유는 하나님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내 삶에 발전과 성장과 확장의 욕구가 하나님으로부터 실제 일어나게 되며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범위한 정복 전쟁에 대한 보고입니다. 다윗이 지경을 넓힌 셀 수도 없는 정복과 확장얘기가 나옵니다. 블레셋, 모압, 소바, 아람, 아말렉, 하맛, 에돔 등의 이방민족을 쳐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서 조공을 받는 명실 공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의 실질적인 경계를 다윗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시점으로부터 계산을 해보면 무려 1100년이 흐른 뒤에야 다윗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하셨던 가나안 땅의 경계가 충족되어지면서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다윗의 정복사업과 영토 확장과 국가의 성장 등이 단순한 보도 같으나, 이 확장에 대해서 6절과 14절에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는 토가 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을 근거삼아 확장 욕구를 가지고 삽니다. 사업이나 목회 등이 성장하고 확장되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러한 내용이 아닙니다.

주석 책들이 본문의 제목을 다윗의 정복활동으로 붙이고 있지만 아닙니다. 사실 이 본문은 다윗의 자족과 하나님의 확장 역사로 봐야 정확합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복조차도 아닌 확장일 뿐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본문에 있습니다. 4절에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합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왕이 될 자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의미가 상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껏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천칠백 필의 말 중에서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 발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일백 대의 말은 농사에 사용하는데 그 당시의 말과 병거는 요즘으로 말하면 최신예무기와 같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영토를 확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면 절대로 말의 발의 힘줄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의 발의 힘줄을 끊는다.’는 것은 다윗이 정복의 욕구를 갖고 있고 말과 병거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복을 하는 재미는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정복 전쟁으로 얻게 되는 모든 금, , , 놋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서 나중에 성전을 짓게 됩니다만, 이러한 정복은 내 소유를 확장하겠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천칠백 필이나 가지게 되면 확장과 성장과 발전에 대한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칭기즈칸과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대제국을 만들었던 것과 같이 말을 타고 달리다 막히면 확장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의 발의 힘줄을 끊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성장과 확장과 발전 욕구를 끊어버렸다는 것이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족하는 상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앞장 13~14절에서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건축하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는 장소는 지금도 성막으로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두는 것은 존재와 이름의 관계에서 나의 마음에서 첫 번째로 받아들여진 그 이름을 추구하게 됩니다. 즉 다윗의 확장 욕구는 하늘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얻는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내 마음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으므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하늘을 향합니다. 이로부터 여호와 신앙적 자족이 생겨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게 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영토가 확장된 것은 다윗의 욕구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확장 계획에 따라서 일어난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의 확장 욕구를 계속 죽이면서,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채우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완전한 자족 속에서 완전한 확장이 실제로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확장 욕구는 쉽게 말해서 죄악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커지기를 바라고, 목사는 목회가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성장과 확장의 욕구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이것들이 죄악입니다. 이유는 한 마디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느 한 순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려는 복음적 자족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자족이 일어나야만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확장을 주도하실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도록 지어진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이즈에 맞추어져 피조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이즈에 맞도록 지어진 마음에 장로님이 사업을 쏟아 넣는다면 그 사업체는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장로님의 마음을 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전심을 다할수록 마음이 넘쳐나게 되는데 그 사업체가 장로님의 마음을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넘쳐나는 마음 분량이 지금 마음을 쏟고 있는 사업체가 늘어나기를 바라게 되고 이게 바로 확장 욕구가 생기는 심리적 원리입니다. 뭔가를 크게 하고 싶고 변화시키고 싶고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에 쏟아져 들어가는데 그것이 내 마음을 다 수용하지 못하므로 넘쳐나는 마음 분량이 있습니다. 이 넘쳐나는 마음의 몫이 자꾸 확장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기는 쏟아도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마치 살이 많이 쪄서 바지가 작아지면 바지를 늘려야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살처럼 넘쳐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차를 사면 추가적으로 부품을 더 달거나 떼어서 튜닝을 합니다. 그런데 자동차 전문 디자이너들의 말에 의하면 자동차는 회사에서 설계된 대로 출고되었을 때의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비싼 부속을 더 달아준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튜닝을 하는 이유는 자동차에 마음을 쏟는데 자동차가 그 사람의 마음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넘쳐나는 마음 분량이 자동차에 대한 성장을 원하고 확장을 원하므로 계속해서 돈을 쓰며 차의 모양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성형외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해 뒤에서 하시는 말씀들이 뭔지 아십니까? 성형수술을 위해서 한 사람이 오면 이미 그 사람에게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구현되어 있고, 그 얼굴은 누구도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유일한 얼굴이고 완벽한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주문에 의해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굴에 마음을 쏟으면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넘쳐나게 되기 때문이고, 그 넘쳐나는 분량에 대해서 요구가 일어나게 되어 안 해도 될 성형수술을 하게 되며 점점 더 괴상하게 인상이 변해갑니다. 성형외과 의사들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일이고 손님이 원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나간다고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구 전체보다 우주 전체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에 이 이론에 불과한 얘기가 우리 마음에서 체감이 돼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계 정복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정복이 우리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서 달나라까지 정복해야 하고 화성까지 정복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도 다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목성, 수성, 금성도 정복해야만 하고 은하계를 정복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에서 이 세상에 대한 확장 욕구가 생기는 것이 죄악입니다. 죄는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고 그것으로부터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죄악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확장하고 성장하고 싶더라도 하나님 뜻에 있으면 이루어질 것이고 없으면 포기하세요. 성장하지 않고 확장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은 부족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의 몫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해서 이 땅을 향하여 자족하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실제 확장과 실제 발전은 얼마든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다윗이 말의 발의 힘줄을 끊고 금과 은과 동을 사울처럼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확장 욕구도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자족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확장 계획이 있다면 이루어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